버티며 살기(펌)

산악인들의 93년 아지트, 국가 소유로 바뀐다는데 ---백운산장

moonbeam 2017. 3. 20. 11:44

국내 1호 민간 산장 북한산 백운산장
지난달 북한산 약 800m 높이에 자리한 백운산장에서 이영구 씨가 산장을 가리키며 “나의 모든 추억과 기억이 산장 곳곳에 새겨져 있다. 소중함을 말로 다 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백운산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산악인들과 함께 국가 귀속 반대 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국내 최초의 민간 산장, 그리고 북한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산장.”

내 소개야.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을까? 나는 흰 구름이라는 뜻의 ‘백운(白雲)’이야. 사람들은 백운산장이라고 부르지. 난다 긴다 하는 산악인들은 모두 나를 잘 알지. 그런데 요즘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더 늘어났어. 내 주인이 바뀔지 모른다는 소식 때문이야. 나는 대대로 이씨 가문의 소유였는데 5월부터 나라님이 새 주인이 될 수 있다네. 하지만 내 친구인 산악인들은 이씨 가문이 계속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이야. 나라가 주인이 된다고 내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행여 내 성격이나 역할이 바뀔까 걱정이라네. 4000명이 넘는 사람이 반대 서명에 동참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의 시작

나는 1924년 봄에 태어났어. 지금 주인인 이영구 씨(86)의 할아버지 고(故) 이해문 씨가 북한산 약 650m 높이에 나를 만들었지.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의 삼각점 중앙에 자리를 잡았어. 지금의 산장 터 바로 뒤 백운암 움막에 작은 둥지를 튼 것이 나의 시작이야. 지금(약 180m²)과 비교하면 규모가 아주 작았지. 이전까지 북한산에 민간 산장은 단 하나도 없었어. 그래서 내가 태어났을 때 다들 기뻐했지.

하지만 초창기에는 말도 못 하게 열악했지. 그때 나를 도와준 이들이 바로 산악인들이야. 1927년에는 백운대까지 등산로 개설을 목적으로, 당시 재계 인사 109명이 750원을 모았어. 지금은 과자 한 봉지도 못 사는 돈이지만 그때는 이 돈으로 3개월이나 공사를 해 쇠 난간을 설치할 정도였으니 어마어마했지. 감사할 따름이야. 쇠 난간 설치 후 나를 찾는 사람들이 갑절로 늘어났거든.

6·25전쟁도 또렷하게 기억해. 나에게도 너무나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어. 1950년 당시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통에 나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거든. 다행히 원로 산악인 고 변완철 씨와 안광옥 씨의 도움으로 1960년 완전히 회복됐지. 새롭게 단장한 내 모습은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장안의 화제였어. 1992년에는 불이 나 지붕이 홀랑 타 버렸는데 역시 산악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자재를 나르는 등 나를 많이 도와줬어. 지금 2층 구조의 통나무 건물은 그때 만들어진 거야.

나의 희로애락

백운산장 입구에 걸려 있는 현판. ‘白雲山莊’ 글씨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고 손기정 선생이 썼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100년 가까이 살았으니 누구보다 많은 일을 겪었지. 가장 기쁜 건 단연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생을 만난 일이지. 중학교 때 산악부원이었던 손 선생은 세계 최고 달리기 실력은 물론이고 등산도 수준급이었어. 누구보다 빠르고 건강한 몸놀림으로 산을 오르던 모습이 생생해. 지금 내 대문에 걸려 있는 현판 ‘白雲山莊’도 손 선생이 직접 써 주신 거야. 1960년대 건강이 악화돼 직접 오시지는 못하고 지인을 통해 전해주셨어. 한번은 모자를 놓고 가서 챙겨 뒀다 돌려준 적이 있는데 지금 돈으로 한 10만 원 정도를 주셨어. 여러모로 인정 많고 산을 사랑하셨던 분이지.

수백만 명이 거쳐 간 이곳에는 당연히 좋은 기억이 아주 많아. 많은 사람에게 안식처가 되고 추억의 장소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어두운 일도 있었어. 대형 조난사고가 일어났을 때야.

최악은 1971년 ‘인수봉 참사’지. 11월 28일인데 그 사고로 7명이나 숨을 거뒀어. 마침 그날은 일요일이었어. 쉬는 날이라 유독 많은 사람으로 산이 북적였지. 11월 말이면 이미 춥고 흐려질 때인데 그날따라 하늘이 너무 파란 거야. 예년에 비해 날씨도 따뜻했고. 모든 것이 좋아 보였어. 그런데 오후가 되니까 갑자기 산이 표정을 바꾸더라. 포근하던 기온이 갑자기 영하 20도까지 뚝 떨어진 거야. 오후 2시가 지났을까. 갑자기 배낭을 멘 남성 두 명이 곧 기절할 듯 기진맥진해 나에게 왔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지. 주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상황이 심각하더라고. 그 사람들이 저 위를 가리키며 “쓰러진 사람이 더 많다”고 하더라고.

안주인인 김금자 씨(77)가 연신 뜨거운 물을 나눠 주며 다친 데 없는지 살피는 동안 사색이 된 주인이 산장에 머물던 남성 몇 명을 대동해 당장 산을 오르더군. 상황은 최악이었어. 인수봉 암벽에 시신이 매달려 있고 바위 곳곳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어. 주인이 신음하는 사람들을 나에게로 데려왔지. 그들을 누이고 따뜻하게 몸을 데워 줬어. 그렇게 해서 산장에 온 조난자가 40명을 넘었지. 산장이 꽉 차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을 정도였어. 엄청났지. 며칠 동안 뉴스가 나오더라고.

이후에도 비슷한 사고가 몇 번 있었지. 1983년 4월 3일에도 기상 악화로 7명이 사망했어. 그때도 내가 구조본부 역할을 했지. 이런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지금도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면…’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즐거운 일은 아직까지 나를 찾는 단골이 많다는 거야.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도 있지. 홍성국 전 미래에셋대우 사장이 대표적이야. 홍 전 사장이 한창일 때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날 보러 와 줬어. 그가 최근 페이스북에 “(백운산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현 경영자인 이영구 옹이 계속 경영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대.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글인 것 같아 좋았어.

나의 미래

어쩌면 나라를 대신해 북한산국립공원관리공단이 나의 새 주인이 될지도 몰라. 공단 측은 내가 대피소 역할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해. 하지만 친구들과 지금 주인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지금까지 여러 민간 산장이 국가에 귀속된 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역할과 규모가 크게 축소됐기 때문이야. 배성우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은 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대피소가 마치 숙박업소처럼 바뀌어 산장 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고 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악천후를 만나거나 부득이한 상황에 처해도 잠을 잘 수 없는 곳이 됐다는 거야. 그래서 ‘백운산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소속 산악인들은 정기적으로 문화제를 열며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어.

외국의 산장은 어떤지 이영준 한국산악회 학술문헌이사에게 물어봤어. 나라마다 사정이 다양하더군. 일본은 대부분 민간이 운영한다고 하네. 도쿠사와(德澤) 산장이 대표적인데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고 베스트셀러인 이노우에 야스시의 ‘빙벽’에도 등장해 관광 필수 코스처럼 됐다고 해. 민간 운영자에 대한 평판도 좋고. 개인이 운영하는 만큼 모든 관리는 알아서 해. 산에서 발생한 쓰레기는 자체적으로 헬리콥터를 이용해 산 아래로 내려보낸다지.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에서도 대체로 민간이 운영하는 산장의 시설이 더 좋다고 소문이 나 있대. 반면 프랑스처럼 산악협회가 대부분의 산장을 관리하는 곳도 있지.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니 어떤 게 ‘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일단 산의 높이나 산장의 대중화 정도도 크게 차이가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좀 혼란스러워. 하지만 분명한 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산악인과 등산객 등 친구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줬으면 한다는 거야. 앞으로도 나는 늘 이곳에 남아 북한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친구로 남고 싶어. 행운을 빌어 줘!
 

▼‘백운산장서 한평생’ 86세 주인 이영구씨 “화재 수리위해 기부채납 서명… 공단, 운영권은 계속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유서 깊은 한국 최초의 민간 산장입니다. 이곳에서 구조한 등산객이 100명이 넘어요. 제발 나와 아들이 계속 운영할 수 있게 해주세요.”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 씨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장 통나무를 어루만지던 이 씨는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곳에서 자라고 늙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1층과 2층을 합해 약 180m² 규모인 산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1층에는 커피와 컵라면을 판매하는 매점, 2층에는 산장 투숙객을 위한 나무 침실이 마련돼 있었다. 산장 한쪽 벽면에 걸린 추억이 담긴 사진들과 색이 짙어진 통나무가 산장의 나이를 가늠케 했다.

지난해 말 북한산국립공원관리공단은 이 씨에게 ‘올 5월 백운산장을 국가로 귀속한다’는 통보공문을 보냈다. 내용은 1992년 공단과 맺은 약정에 따라 이 씨가 산장을 떠나야 한다는 것. 그는 “처음 공문을 읽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고 말했다. 산장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단은 25년 전 일어난 화재였다. 1992년 6월 5일 등산객의 실수로 작은 불이 나 산장 지붕이 탔다. 당시 공단은 공사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때 공단 직원이 “기부채납 조건에 서명하면 공사도 하게 해주고, 산장도 계속 운영할 수 있다”고 말해 서명했다는 것이 이 씨의 설명이다. 공단 측은 이 씨가 기부채납 약정서에 동의했기 때문에 원칙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다. 공단 관계자는 “올 상반기까지 귀속할 방침이지만 정확한 귀속 날짜 등에 대해서는 이 씨와 계속 조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씨에게 산장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자녀들도 모두 산장에서 키워 학교에 보냈다.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혹여 방 한 칸 얻을까 싶어 마련해 둔 돈도 모두 산장 운영에 쏟아부었다. 산악인과 등산객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40여 년 전 자비를 들여 돌계단도 만들었다. 조난객이 있으면 누구보다 앞장섰다. 인수봉 참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사고가 있을 때마다 직접 달려갔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시체가 암벽과 부딪쳐 내는 소리, ‘도와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 정도로 생생하다”고 했다.

백운산장 뒤에 작은 암자가 있지만 이 씨는 여전히 산장 안에 마련된 12m² 남짓한 방에서 잠을 잔다. 산장이 너무 좋아서다. 그는 인터뷰 내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 산과, 산악인과 함께 백운산장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지영 jjy2011@donga.com·신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