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은 오랜 지혜의 저장고이다. 부엌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전통이 다채로운 삶의 문화를 만들었다. 부엌은 철마다 자연을 들이고 내는 살아 있는 소통 공간이다. 누구나 철마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제철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알았다. 자본이 주는 얼굴 없는 음식에 길들고, 스스로 자기답게 먹는 법을 잊어버린 시절,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저마다 갖가지 제철을 먹고 저장하는 부엌을 만났다.
제철 만나는 여름 부엌
홍대 앞에서 제철을 요리하는 카페 '수카라' 대표 김수향(43세) 님과 마침 한국을 방문한 재일교포 나순자(69세) 선생님을 함께 만났다. 일본 교토에 살면서 40여 년 한국전통음식을 연구해온 부엌살림 이야기와 제철 채소와 열매를 갖가지 방식으로 요리하고 발효 저장하는 여름 부엌살림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까지 대부분 냉장고 없이 살았어요. 전통 지혜를 철마다 적용해왔어요. 냉장고가 부엌에 들어오면서 사람들 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계절 상관없이 냉장고에 쟁여놓으면서 제철 음식을 못 먹게 된 겁니다."
나순자 님은 건강에 갖가지 문제가 생기는 원인으로, '냉장고 문화'를 지목한다. 부엌은 오랜 전통이 집약되어 있고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공간이었다. 늘 삶의 중심이었는데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 냉장고 기능도 다양해지고 온갖 편리한 도구들로 가득하지만, 단지 끼니를 때우는 공간이 됐다.
"앞으로 더 주변으로 밀려날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 대형마트에 의존하고, 즉석식품이나 가공식품을 데우거나 전자레인지 돌리는 것이 요리와 부엌을 대체했어요."
자본이 부엌의 실종을 빠르게 부추기고, 삶의 주도권을 빼앗고 있다. 그런 삶은 건강하지 않다.
김수향 님이 카페 수카라를 시작한 계기는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11년 전 일본을 오가면서 잡지 만드는 일을 하는 동안 삶이 망가졌다. 일을 하다 정신 차리면 문 연 곳이 편의점과 고깃집 말고는 없었다.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유기농 농부로부터 제철 재료를 받아 요리하는 레스토랑 카페를 생각했다.
"수카라를 열고 보니, 다품종 소량생산 농부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생협조차 어느 정도 규모로 생산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는 탓입니다. 카페 부엌은 냉장시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있을 때 많이 쟁여놓고 많이 만들어 냉동해 놓게 됩니다. 냉장고 중심 부엌은 대형마트 식 소비 행태를 전제하니까요."
그날 먹고 소비할 만큼만 날마다 구입할 수 있는 시장도 사라졌다. 아침마다 조그만 접시에 그날 먹을 채소를 조금씩 파는 태국 치앙마이 시장 같이 곳이 제철을 먹을 수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고민이 다품종 소량생산 도시농부와 요리사가 함께 여는 농부시장 '마르쉐'로 이어졌다.
"마르쉐를 시작한 뒤로 냉장고를 덜 쓰게 됐어요. 제철을 다채롭게 요리할 수 있는 상황을 함께 만든 겁니다. 제철이 아닌 것을 먹으려는 건 사실 욕망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에요."
제철을 먹는 기술, 제철을 먹는 생활의 여유, 제철에 대한 시각이 다 변해야 한다. 어떻게 제철의 것을 먹고살 것인가. 이것이 핵심이다.
예전 어머니들은 제철만 요리했다. 예전에는 냉장고 대신 '찬장'을 썼다. 유리문을 여닫고 옆은 바람이 통하는 구조인데, 아침에 만든 반찬, 당장 먹을 제철 밑반찬을 넣어뒀다.
"먹다가 남으면 말려 저장했어요. 계절이 바뀌면 자연 화학작용으로 숙성되고 영양이 풍부해지거든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제철 음식으로 부엌을 꾸리는 기술, 요리하는 기술입니다."
또한 냉장고 없던 시절에는 음식을 독점하지 않았다. 수박 한 통 들어오면 접시 들고 다니는 것이 일이었고, 관계를 잇는 함께 먹는 문화가 당연했다. 우리나라 저장음식에는 냉장고 없던 시절 지혜가 들어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 농부들은 자급을 위한 농사를 지었고 잉여를 나눴다. 그것을 어떻게 보관하고 가족에게 오랫동안 먹일 것인가 고민하면서 저장과 발효 기술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부엌의 지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 한순간 물, 공기, 흙이 모두 사라졌다. 문제 핵심에는 전기가 있다. 어디에서 온 전기인지 모르면서 소비하게 하는 체계였다. 전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스란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사고 당시 냉장고를 쓸 수 없으니, 아사(餓死) 직전까지 갔어요. 다 상하고 먹을 것이 없는 거예요. 생존 위기를 몸으로 느꼈어요. 지금까지 '인간력'을 잃어버리고 살았구나. 냉장고와 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어요."
김수향 님은 그 뒤로 전자레인지를 버렸다. 전기 없이 가공하고 저장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지금 부엌은 '앞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답하지 못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람들이 살았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발효와 저장'이다.
일본 교토는 매우 덥고 춥고 습한 곳이다. 어느 곳보다 보존과 저장에 대한 고민이 많다. 나순자 님은 오래전 아주 작은 냉장고로 바꿨다. 아무리 바빠도 그날 먹을 것을 그날 바로 만들어 먹는다. 외식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제철 채소 몇 가지만 있으면 풍성한 밥상을 차릴 수 있어요.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을 익히면 식생활이 풍요로워져요."
무엇보다 냉장고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냉장고 불이 꺼지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남자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인간력', 생활력이 있어야 해요. 먹는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정말 중요해요. 식물을 요리하는 감각을 익혀야 해요."
지금까지 냉장고에 의존해왔던 생활방식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마웠지만, 앞으로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극심한 기후변화, 화석연료 고갈, 핵발전소 위험이 일상에 놓여 있다. 지금까지 누리던 맛은 지금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 존재할 수 없다.
"발효와 저장을 공부하는 이유는 몸이 원하는 것을 어떤 상황에서도 먹을 수 있는 능력, 요리력을 갖추려는 겁니다."
우리 일상에서 전기를 하나씩 배제시키고, 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여러 가지 삶의 기술이 들어오는 통로다.
음식과 관련해 여름은 특별한 시기이고 여름부엌 공간은 더더욱 그렇다. 여름에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옛날 부엌은 한국도 일본도 통풍이 좋았다.
"도시 부엌은 통풍이 안 되니까 음식도 쉬 상하고, 요리를 더 안 하게 됩니다. 냉동식품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거죠. 여름이야말로 제대로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하는 때입니다. 적당히 생각 없이 먹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먹는 음식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여름 부엌에서 살아남기
우선 말리기가 손쉬운 방법이다.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는 한국의 지혜이다. 말려서 바로 요리에 쓰거나 가루를 내서 뿌려 먹을 수 있다. 나순자 님은 덥고 습한 일본 교토에서 다양하게 말리기를 해왔다. 생선에서 채소, 고기까지 다 말릴 수 있다. 훈제도 가능하다.
"종이상자는 종이와 종이 사이 공기층이 있어요. 펼친 상자에 채소를 널어놔요. 무청 같은 것은 상자를 삼각형으로 세워 걸쳐놓죠. 버섯 종류는 볕을 보게 하고, 푸른 채소는 그늘에서 말려요. 1주일 정도 가끔 뒤집어 주면 됩니다."
방풍, 깻잎을 비롯해 다양한 말린 채소를 가루 내 소금과 섞으면 풍미가 좋은 소금이 된다. 일본 NHK에서 나순자 님 방법을 과학자가 실험했다. 종이상자가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많이 말려서 쌓아두고 1년 내내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에 넣지 않고 보관하려는 것이다. 제철을 요리해 먹고 남는 것을 말린다. 말린 뒤 오일과 설탕을 넣어 2차로 가공하면 새로운 맛과 식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교토보다 한국은 더 말리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집안으로 한두 시간 햇빛이 들어올 때 나무식기, 도마, 도자기 식기, 젓가락 숟가락을 소쿠리에 올려놓고 '햇빛 살균'하는 것이다.
여름에 너무 차게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되레 생강 같이 몸을 따듯하게 하는 음식이 필요하다. 밖에서 종일 찬 것을 많이 먹는데, 집에서는 된장국, 밥, 장아찌, 김치 정도로 간소하게 먹는 것이 좋다. 여름에 고기를 많이 먹으면 소화에 에너지를 뺏기는 탓에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여름에는 우선 부엌에 쟁여 놓은 것을 비워 가볍게 하고, 설탕 단맛을 최대한 피하고, 수입 과일보다는 제철 과일과 채소를 주로 먹는다.
일본 '우메보시'는 대표 여름 절임반찬. '매실을 말리다'는 뜻이다. 황매에 소금 14~20퍼센트 정도 넣고 한 달 뒤, 햇빛 쨍쨍한 날 대나무 소쿠리에 매실을 건져 펼쳐놓는다. 3박 4일 동안 햇빛 달빛 받아가며 말리면, 우메보시가 된다. 300년 된 것도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다. 매실을 햇빛에 살균도 하고 숙성시키는 것이다. 반찬이면서 방부 역할도 한다. 상온에서도 밥에 박아 두면 상하지 않는다.
"여름에 없으면 안 되는 음식이에요. 말린 채로 보관하거나, 다져서 페스토처럼 조미료로 쓰죠. 매실 씨앗도 육수를 내 국을 끓여요. 매실을 건져낸 '우메수'는 신맛이 나서 식초라고 불러요. 여기에 생강을 절여놓고 먹죠. 초밥 문화를 지탱해왔어요."
'누카즈케'도 중요한 여름 절임반찬이다. 쌀겨나 밀겨를 가볍게 볶아 소금물과 섞어 발효시킨 것이 '누카도코'다. 여기에 형형색색 갖가지 채소들을 소금으로 밑 절임한 뒤 넣어두면 장아찌 같은 누카즈케가 된다.
"토마토나 가지도 가능해요. 빨리 먹을 거면 하루 정도면 되고 조금 신맛을 원한다면 일주일 정도 넣기도 해요. 가끔 손으로 뒤적여 상재균으로 발효시켜요. 일본에서는 시집갈 때 엄마가 집안 누카도코를 물려줘요. '가족균'을 물려주는 거죠."
우리나라는 된장에 채소를 꽂아두는 문화가 있다. 요즘은 꽂아둘 만큼 장을 많이 담지 않으니까 발라 두기만 해도 된다. 된장과 술지게미를 반반 섞어 무를 꽂아 장아찌를 만들기도 한다. '나라즈케'라고 박 종류인 백과 속을 파낸 뒤, 소금에 절여 술지게미를 켜켜이 펴 발라 장아찌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군산과 남원 쪽에서 아직 만드는 곳이 있다.
여름에는 연잎이나 감잎을 활용하면 방부 효과가 있어 상온에서 2~3일 먹을 수 있다. 주먹밥이나 생선과 밥을 싸거나 김치나 장아찌 담글 때 위에 덮기도 한다. 지역마다 잎을 활용한 사례를 모아보면 다양하게 응용해볼 수 있다. 우리는 유통기한 숫자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만, 발효 먹을거리들은 유통기한을 계량할 수 없다. 자신의 몸을 믿고 자기 혀로 확인하는 것이다. 김수향 님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몸을 만들라, 그런 감각을 익히라 말한다.
"계량화로 균일한 맛을 내기는 좋아졌지만, 철마다 지역마다 해마다 기후에 따라 모두 맛이 다르거든요. 된장도 그해에만 나는 맛이 있는 거예요."
여름을 잘 나는 방법은 불을 최대한 안 쓰는 것이다. 찬물에 된장을 푼 냉된장국을 비롯해 다양한 냉요리법이 있다. 발효 저장음식이 있다면 더 쉽게 불 안 쓰는 요리가 가능하다. 날마다 새로 만들지 않아도 되니 생활의 속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발효와 저장은 여름부엌을 지키는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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