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부인 김현경씨
자택에 서재 꾸며 유품 전시
누울 곳 없는 김수영의 '풀'…방 한 칸에 걸었죠
"거창하게 문학관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김수영 시인이 생전에 쓰던 서재만이라도 되살려 놓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육필 원고와 시인이 보던 책 등 모든 자료를 내놓을 뜻이 있습니다. 40여년간 혼자서 간수해 왔는데, 이젠 저도 늙고 지쳤어요."
김수영(1921~1968) 시인의 부인 김현경(85)씨는 김수영 문학의 목격자이자 조력자, 그리고 관리자다.
마지막 작품 <풀>을 비롯한 김수영의 시와 산문 원고, 손때가 묻은 사전과 책들, 번역할 때 주로 사용했던 식탁과 의자, 앉은뱅이책상, 수시로 들여다보곤 했던 거울 등 '김수영의 모든 것'을 그가 관리하고 있다.
김수영과 마지막 날들을 보냈던 서울 마포 구수동 집부터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 아파트까지 수십 차례 이사를 다닐 때마다 가장 소중하게 챙긴 것이 고인의 유품들이었다.
지난해 4월 말 경기도 광주에서 지금의 집으로 옮겨 온 김씨는 얼마 전 방 한 칸을 생전 김수영이 쓰던 서재 형태로 꾸몄다. 1965년 미군부대에서 사서 썼던 널찍한 식탁과 의자 여덟 개가 중앙에 자리잡았다.
사전 등을 펼쳐 놓고 작업하기 좋아서 김수영이 주로 번역할 때 사용했다는 탁자 위에는 김현경씨가 주워 시인에게 선물했던 반백년 넘은 나뭇잎들이 펼쳐져 있고, 의자 하나에는 김수영의 흑백 사진이 올라앉았다.
김수영이 숨지기 얼마 전에 쓴 시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에서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磁器) 스탠드가 울린다"라고 썼던 그 테이블과 의자들이다.
"육필원고 다 내놓을 뜻 있다
전시 공간 없다는 게 서글퍼
서울 문인 문학관 세웠으면"
산문원고·일기는 궤짝 속에
충북 집선 유품 도둑 맞기도
양쪽 벽에 붙여 놓은 책장에는 액자에 담긴 <풀>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영문판 <파르티잔 리뷰>와 일어판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다자이 오사무 전집 같은 책들, 시인이 틈날 때마다 손에 들고 보았다는 거울 등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여자> <육법전서와 혁명> <서책> 같은 시 원고, <내가 생각하는 시의 뉴. 후론티어> 등 산문 원고, 네 권에 이르는 일기 공책, 연세대 강의에서 교재로 쓰기 위해 시인이 직접 필사한 엘리엇의 시극 <칵테일파티>와 장시 <황무지>, 어린 아들의 한문 공부를 위해 직접 써 준 한자 노트 같은 귀한 자료들은 미처 전시 공간을 찾지 못해 봉투에 담긴 채 궤짝 깊숙이 잠자고 있다. 문인장으로 치러진 김수영 장례식에서 낭독했던 조사를 박두진이 직접 붓으로 정서해 기증한 액자, 부업 삼아 양계장을 했던 구수동 시절 닭장 위에 키웠던 박을 따서 말린 바가지들, 시인이 사용했던 일제 노리다케 찻잔 세트와 크고 작은 도자기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집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노리다케 찻잔 세트 역시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에 등장하는 물품이다.
김현경씨는 한동안 충북 보은에 문학전시실 삼아 마련한 집에 김수영의 유품들을 보관했는데, 6, 7년 전쯤 도둑을 맞았다. <엔카운터 지>라는 시에 등장하는 잡지 <encounter>와 <파르티잔 리뷰> 5~6년치, 창간호를 포함한 <현대문학> 수십권, 동료 시인들의 친필 서명 시집 수십권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 큰 사고가 생기기 전에 제대로 된 보관·전시 공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시인의 출생지는 서울 관철동 삼일로 빌딩 자리이고, 가장 오래 살았던 구수동 집터에는 지금 다섯 동짜리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문학관은커녕 소박한 서재 하나 마련할 만한 공간이 여의치 않은 거예요. 지방에 가면 친필 엽서 하나 없는 수십억원짜리 문학관도 있던데, 김수영 같은 시인의 자료를 전시할 자그마한 공간도 없다는 게 서글픕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덕수궁 석조전 같은 건물을 '서울 문학관'으로 변경해 이상과 박태원, 임화, 염상섭 같은 서울 출신 문인들을 함께 기렸으면 좋겠어요." 용인/글 최재봉 기자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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