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신앙 vs 이성 --- 김요한목사

moonbeam 2015. 1. 20. 17:35

신앙 vs 이성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비이성적, 혹은 초이성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사람일수록 비이성적, 혹은 초이성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줄 알고 있고, 또 은연중에 그걸 요구받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러다 보니, 교회란 곳이 온통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언설과 행동과 사건으로 가득찬 곳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실상은 기독교 신앙은 지극히 이성적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의지적으로 수납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거나 동의하지 않고서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냥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자세히 살핀 후 그 내용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수납하는 것이다.
즉 이성 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사용해서 믿는 것이다.
물론 그 믿음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가 절대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도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서 믿음을 수여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이성을 말살시켜놓고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시는 분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을 가리켜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이라는, 그림 언어를 쓴다.
이 말에는, 원래의 창조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고장이 나서, 다시 고쳐서 원래의 창조물로 되돌려 놓은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기독교적 구원의 의미는, 최초의 창조시에 인간에게 수여되었던 하나님의 형상됨을 되찾는 사건이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인간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활동, 신체적 활동, 문화적 활동, 관계적 활동, 영적 활동 등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됨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위의 열거한 모든 활동들을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여 합리적으로 행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내포되어,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됨을 회복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본래적 이성을 회복해서 더 올바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신앙은 이성과 배치되거나 양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 바른 기능을 행사하게끔 돕는다.
그러므로 신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지성적이라고 하는 것과 동의어다.
곧 지성을 올바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며, 정의를 행하며, 자기 실현을 하며,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며, 기도하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일을 그냥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올바로 사용해서 더 합리적으로, 더 윤리적으로, 더 체계적으로 그것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달리기를 할 때 두 발로 함께 뛰는 것처럼, 이성과 믿음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동반자지, 적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이런 반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영적인 일들, 기적들, 기도의 응답들은 비이성적 혹은 초이성적 현상이 아닌가?"
이에 대해 간단히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에서 영적 혹은 육적이란 표현을 쓸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흔히 생각하듯 인간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영혼과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일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서 있을 때는 영적이라고 지칭하고,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사단과 악을 향해서 서 있을 때는 그것을 육적이라고 부르는 (바울의 고유한)전문 용어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고서, 한국교회 일반에서 이해하는 그런 뉘앙스로서의 영적인 현상에 대해서 논한다 해도, 내 주장과 결론은 동일하다.
나의 경험과 임상 통계에 따르면, 영적 체험의 일종이라고 하는 예언, 방언통변, 환상 등등의 일체의 현상이 비이성적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역동 속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최근 나는 한 목사님 가정을 방문해서 장시간에 걸친 담소를 나눈 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기 전, 그 가정을 위해서 잠시 축복 기도를 해드린 적이 있다.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하자, 성령께서 다음과 같은 환상과 말씀을 보여주셨다.
"한 여성이 고구마를 깨끗이 씻어서 솥에 가지런히 쌓아놓고, 난로 불위에 올린 다음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고구마를 정성스럽게 씻어서 냄비 안에 넣었지만, 그러나 고구마가 익으려면 얼마만의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목사님과 사모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더 잘 섬기기 위해서 그동안 정성스럽게 많은 준비를 해왔고, 그래서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왜 우리 길을 빨리 안 여시는가에 대한 궁금함과 답답함이 있지만, 그러나 두분에게 좀 더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두 분이 깨끗히 준비된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고, 하지만 내면이 더 깊이 영그는 훈련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런 식의 기도를 10여분 쯤 하고 끝난 후에, 그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본인들이 평소에 집에서 고구마를 씻어서 불위에서 쪄먹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처음 기도할 때 무척 놀랐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하루에도 이런 경험을 몇 번씩 하곤 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성령께서는 심지어 환상이나 예언의 형식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100% 잘 알고 있는 사건과 사물과 기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우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시지, 우리가 전혀 모르는 뜬금없는 이야기나 그림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도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영적인 세계의 경험이란 것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지성적 사건인가를 절실히 체감한다.
물론 가끔은 우리의 인식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신비한 경험이나 사건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체험조차도,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 계획하시고 준비하고 계시는 은사와 기업은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며, 또한 그분의 자녀들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주관하셔서 결국은 가장 최선의 결과를 선물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그런 신비적 체험과 성경이 합리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개신교의 큰 병폐 하나는, 교회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중 하나인 이성을 과도할 정도로 무시하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성이란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 취급당하기 일쑤이고, 목사들의 설교에 황당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하며, 심지어 세상에서는 상당한 지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조차 교회 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 자신의 지성을 차에 때어놓고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현상이 아주 심하다.
그래서 교회 안에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달리 말하자면 세상의 상식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괴상망측한 일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복음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버젓이 벌어지는 데도 아무도 이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진정한 복음의 능력은,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장 활성화시켜서 건전하고 정의롭게 사용하도록 인도한다.
한국교회는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지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것에게 바른 자리를 되돌려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지성이 교회 안에 충만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