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그리고 멋(펌)

애써 심심하게 살고 싶은 박성우 시인 --- 안도현

moonbeam 2016. 3. 17. 19:50



배가 고파서 미숫가루라도 실컷 먹고 싶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을 들고 나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과 슈거 같은 인공감미료도 몽땅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우물 속의 미숫가루를 저어 마셨다. 그러나 소년은 어른들에게 들켜 생전 처음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맞아야 했다.

이 미숫가루 소년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새는 왜 공중을 날아가면서 똥을 싸는 것일까? 그때 기분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소년은 똥이 마려워지기를 기다리다가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 엉덩이를 깠다. 그리고는 새처럼 나뭇가지 위에서 똥을 내갈겼다. 이어 소년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인류 최초로 공중에서 똥을 싼 기록을 남기고 소년은 옥수수밭으로 곧바로 추락했다.

1971년생, 이 소년은 자라서 시인이 되었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부터였다. 다들 한물갔다고 여기는 농경문화적인 상상력을 여전히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박성우다. 그는 기억을 과거의 검은 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불쏘시개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시에 자폐성 자아 따위는 없다. 말을 빙빙 돌리지도 않는다. 그 무엇이든 박성우의 경험 속에 들어가면 모두 시가 된다. 아버지의 거친 두 손을 두꺼비로 비유한 그의 시 ‘두꺼비’는 고등학교 국어시험에 종종 지문으로 등장한다. 언젠가 시험을 보다가 시를 보고 엉엉 울었다는 학생을 만난 적도 있다.

박성우 시인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봤다. 제주 바다 광어 양식장에서 사료를 뿌렸고, 오일장을 돌며 두부를 팔았고, 학습지 외판원도 경험했다. 전기공사장, 막노동판을 떠돌았고 군고구마 장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면서기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산골 소년은 시인으로 살고 싶어 야간대학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갔다. 낮에는 봉제공장 ‘시다’로 일했다. 공장노동자로 일하던 20대의 그가 역 광장에서 피켓 들고 시위하는 장면이 신문에 나온 적이 있다. 그가 그 흑백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아픈 성장기를 보낸 박성우 시인은 우리 문학에 새로운 장르 하나를 개척했다. 그가 우리나라 최초로 펴낸 청소년 시집 <난 빨강>이 그것이다. 이 시집은 청소년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6만부 이상이 팔렸으며,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여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인의 어머니는 그가 다니던 대학의 청소부였다. 어머니는 ‘왕언니’로 통했다. 청소를 제일 오래 해서 왕언니였고 나이가 제일 많아 왕언니였다. 시인의 어머니는 호적에 다섯 살이나 적게 올라 일흔한 살까지 청소노동자로 일했다. 시인은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시를 발견했다.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시의 자산으로 삼을 것은 저 어머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나도 세상에 대해 할 말이 좀 있구나 싶었던 거죠.”

나는 그가 서른여섯이 될 때까지 연애다운 연애 한 번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시를 눈여겨보던 한 처녀와 마침내 눈이 맞았다. 그녀는 당시에 박성우 시의 애독자였지만 그 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권지현 시인이다. 그녀는 시인을 끌어안아준 손으로 시를 낳는 사람이 되었다.

시인의 어머니와 장모는 이름이 똑같다. 둘 다 ‘김정자’다. 시인의 어머니는 전북 정읍에서 정읍으로 시집간 김정자고 시인의 장모는 경북 봉화에서 봉화로 시집간 김정자다. 둘 다 산골짜기에서 나서 산골짜기로 시집간 김정자다. 시인은 해마다 어버이날 전후에 이 두 김정자를 상봉시킨다. 다행히 이 두 김정자는 ‘근당게요’와 ‘그러이껴’를 주고받으며 죽이 척척 잘 맞는다.

박성우 시인은 ‘딸바보’인데,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는 딸 규연이가 있다. 일찌감치 장래희망을 ‘작가’로 정해놓은 규연이를 나는 ‘꼬마시인’으로 부른다.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엄마아빠보다 더 뛰어난 글을 쓸 것 같다. 여기 증거가 있다.

“나중에 아빠 늙으면/ 규연이가 아빠 업어 줘야 해?// 그래 알았어// 근데 아빠,/ 아빠는 할머니 몇 번이나 업어 줬어?”

“악어야, 미안해./ 니 칫솔인 줄 모르고 니 칫솔로 화장실 청소를 했어. 칫솔이 워낙 커서, 변기 솔인 줄 알았거든.”

최근에 박성우 시인이 낸 두 권의 동시집 <우리 집 한 바퀴>와 <동물 학교 한 바퀴>에 각각 실려 있는 시다. 시인은 “애써 심심하게 살고 싶어서, 시를 쓰면서 그냥저냥 늙고 싶어서” 몇 년 동안 몸담고 있던 대학에 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가 그것을 가슴에 안았더니 시가 되었다고 한다.

“아빠? 응!// 엄마들은 왜 아가 재울 때/ ‘코’ 잘 자, 해?/ 눈이 자니까/ ‘눈’ 잘 자, 해야지!// 코가 진짜 자면 큰일 나잖아, 그치?// 아빠, 눈 잘 자./ 엄마, 눈 잘 자.”

아이가 한 말을 아빠가 그대로 받아쓴 시다. 이런 경우 책 판매로 얻는 인세는 누가 받아야 할까? 박성우 시인은 당연히 자기가 받아야 한다고 우긴다. 딸애의 말을 공짜로 얻어 쓰는 게 아니라 잠을 설치며 고생고생해서 쓰기 때문이라는 것.

조심스럽지만 박성우 시인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하다. 무얼 먹어도 살이 붙지 않는, 허수아비처럼 허술해 보이는 몸이다. 장가를 든 뒤에 처가에서 하도 안쓰럽게 여겨서 혼자 몰래 강아지 사료를 씹어본 적도 있다. 갸름한 얼굴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처럼 까무잡잡한데, 한마디로 측은지심을 유발시키기에 딱 맞는 모습이다. 시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낸 시집의 첫 장에 나오는 사진을 보고도 시집을 사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라는 농도 있다.


하지만 그는 무에타이와 킥복싱의 숨은 고수다. 그는 대한킥복싱협회 어떤 지역의 부회장 직함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소위 플라잉 니킥이라고 하는 무릎 찍기 기술과 팔꿈치를 L자로 구부려 치는 기술의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술자리에서 한 발언이니 신빙성은 보장하지 못한다. 나는 그가 싸웠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경향 각지의 주먹깨나 쓴다는 이들은 박성우 시인 앞에서 괜히 깐죽거리는 일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