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마르다와 마리아눅 10:38-42 --- 최주훈 목사

moonbeam 2016. 7. 18. 11:04



잘 알려진 본문일수록 설교 때 졸게 만드는 특효약이 됩니다. 들어볼 필요 없이 다 안다고 지레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본문은 목회자에게도 독이 됩니다. 본문을 묵상하고 연구할 필요 없이 뻔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력 복음서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눅 10:38-42)

<본문 요약: 통상적 해석>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집에 들어갑니다. 언니 마르다는 식당에서 일하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짜증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놀지 말고 날 좀 도우라고 내 동생을 따끔하게 타일러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놀고 있는 동생 편을 듭니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이해하고 있던 본문 요약입니다. 그래서 통상 마리아는 칭찬 받는 여인이었고, 마르다는 못된 언니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석해버리면 한 가지 주제만 남습니다. '노동보다 말씀 듣는 것이 선하다'라는 결론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 하지 않고 말씀 듣고 있던 마리아가 예수님께 칭찬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통 설명합니다.

<통상적 적용>
그래서일까요? 한국교인들이 가정과 직장 업무 같은 일상의 노동보다 예배, 기도회, 성경공부하러 교회 가는 것을 더 성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실제로 심심찮게 들리는 소리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특별새벽기도회와 교회 부흥회 때문에 회사에 매번 지각하고 업무 시간에 자꾸 졸다가 상사 눈 밖에 나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런 일이 생겼는데, 교회 목사가 오히려 해고당한 교인을 칭찬하며 이 일을 예배시간 간증거리로 삼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좋아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이 만복으로 채우실 것이다.’라고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 교회 목사는 세상 속에서 땀 흘리는 노동보다 '교회 잘 다니면 결국 복 받게 되어 있다'는 처방전을 내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것은 돌팔이 처방입니다.

<신성한 노동의 가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노동을 단 한 번도 경시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창조 때부터 일하는 것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직접 보여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또한 창조 사역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돌보고 관리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다시 말해,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거룩한 삶이란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던 예수님이나, 텐트를 손수 만들어가며 이방선교를 했던 바울이나, 세상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고 신성한 것이라고 설파했던 종교개혁자 루터도, 모두 '노동은 신성하다'는 창세기의 일하시는 하나님 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신성합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것을 오히려 축복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일하는 마르다를 책망하고 타박하는 듯 본문을 읽어내는 것이 바른 독법일까요? 우리가 알던 대로, 그저 못된 언니라서 예수님이 마리아 편을 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뜻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복음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이해의 배경: 미쉬나(Mischna)>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배경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율법'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창출레민신'처럼 ‘쓰여진 율법’도 있지만, 말로 전달된 ‘구전 율법’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쓰여지지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넘겨진 율법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겼고, 이런 구전 율법은 실생활에서 관습법 역할을 했습니다. 이게 아주 구체적인 사례들을 담고 있어서 일종의 가정의례서 같은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후에 이것이 문서로 남게 되는데 이것을 ‘미쉬나’라고 부르고, 이것을 알기 쉽게 랍비들이 다양한 해설을 덧붙인 것을 탈무드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명령으로 알고 생명처럼 지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구전율법인 미쉬나에 나오는 ‘손님 접대법’이라는 가정의례를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엔 일반 손님이 아닌 지혜자나 말씀의 대언자를 접대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이 율법에 충실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접대법의 핵심은, 첫째 집 주인이 손님인 지혜자에게 주인의 권리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손님으로 오신 지혜자의 말을 청종하라는 대목입니다.

<본문이해>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제껏 못된 언니라고 보았던 마르다부터 봅시다.

여기 등장하는 '마르다'의 이름은 원래 “집주인”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마르다는 ‘주인’이라는 뜻의 자기 이름대로 집주인의 권리를 예수님께 기꺼이 넘겨드립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종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어찌나 철저하고 예의 바르게 이 율법을 따르는지는 40절 이하에 예수님께 간청하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런 배경을 머리에 담고 이 구절을 읽어보면, 지금 마르다는 짜증내면서 자기 동생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주인의 권리를 잊지 말고 사용하시라는 겸양의 뉘앙스로 읽어내려 갈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40절을 한 번 풀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손님으로 오셨지만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지혜자이기에 단순한 손님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주인의 권리를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이 명하여 내 여동생도 일하도록 명령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집안의 모든 권리, 심지어 동생의 행동까지도 명령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주인의 권리를 넘겨드리는 마르다의 모습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런 마르다를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이 집의 참 주인으로 자신을 배려하고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그 이름을 두 번 연속 부르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이 부름엔 어떤 감정이 서려있을까요? 저에게 이 두 번의 부름은 마르다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대견함이 서린 온유한 음성으로 들립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41절 하반절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 구절을 좀 명확히 해봅시다. 이 구절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난해하기로 소문난 구절입니다. 이유는 42절에 대한 다양한 사본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마르다야 네가 나를 대접하고 먹이기 위해 여러 음식 만드느라 걱정하고 있지만 괜찮다’, 또는 ‘마르다야 네가 나를 대접하고 먹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음식만으로도 괜찮다’라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일하는 마르다를 우습게 여기고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열심히 일하는 그 삶의 모습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난해해지는 것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르다가 손님 접대법이라는 미쉬나의 율법을 잘 따랐듯이, 마리아도 미쉬나의 율법을 철저히 따른다는 것입니다. 미쉬나 아보트 1:4에 이런 율법이 나옵니다. “너희 집을 지혜자의 모임장소가 되게 하고 그들의 발의 먼지 한 가운데 앉아서 목마름으로 그들의 말들을 마시라”(m. Abot 1:4)

마리아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이 율법에 따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마르다도 율법에 따라 주인의 권한을 이양했고, 마리아도 율법에 따라 발아래서 말씀을 듣습니다. 물론 '발아래에 있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가말리엘의 발아래서 자랐다’(행22:3)는 사도행전의 표현을 고려해 본다면, ‘그가 가는 모든 곳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관용구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마리아도 언니처럼 율법을 따라 행동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την)>
그런데 아직 해소되지 않은 문제가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절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많건 적건 간에 마리아 편을 드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하며 율법의 우열을 가리신 것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노동은 천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제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은 중간에 나온 “이”(την)라고 하는 정관사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의 언어인 고대 그리스어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명사 앞에 정관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문법적으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마리아가 택한 좋은 것’이란 말 앞에 "이"라는 정관사가 굳이 붙어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는 동안 저는 ‘이’라고 하는 이 작은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그리고 이 단어를 통해 본문의 방향키를 다른 곳으로 돌려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율법을 겸손히 지켰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칭찬합니다. 둘의 우열은 없습니다. 노동도 선하고, 말씀 듣는 것도 선합니다. 그런데 “이”라고 하는 정관사 한 글자로 강조점이 이제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합니다.

무엇일까요? 저에겐 이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고 좋은 것’이란 뜻으로 들어옵니다.

설명 드립니다. 모든 하나님의 율법은 다 선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바로 그 시간 속에서 가장 필요한 율법’을 준행하게 됩니다. 말씀 듣는 일과 노동의 우열을 따지며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상황 가운데 가장 바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이 좋은 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식일: 참조-루터의 대교리문답서, 제3계명 안식일 해설>
우리의 상황으로 돌려봅시다. 우리는 매일 때가 되면 가족들의 먹이기 위해 일하고 식사를 준비합니다. 가족의 생명을 위한 신성한 노동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간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일 하셨듯, 6일 동안 가족을 위해 자기 직장과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신성합니다. 이렇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는 자들에게 주님은 마르다에게 사랑스런 어조로 말을 건네셨듯 기뻐하십니다. 땀 흘리며 6일간 열심히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일주일 중의 하루, 주일은 어떻습니까? 이 날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주님의 날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Gottesdienst)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날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6일 간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땀 흘리며 살아간 당신의 자녀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날입니다. 무엇으로 일하십니까? 은총의 도구인 말씀과 성례전으로 지친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회복시키며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해 하나님은 살아갈 용기를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어떤 이들은 새로운 깨달음과 지식을 얻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상처받고 긁힌 영혼에 위로를 얻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지표와 비전을 깨닫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예배를 통해 얻게 되는 힘과 용기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시기 간절히 원하고 그 일을 ‘지금 이 순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나오는 그 시간 그냥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나를 위해 주실 것이 무엇일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치 집에 찾아온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귀를 열고 집중했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을 예배 한 가운데로 주님이 부르신 이유, 그것은 바로 살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하나님을 오늘 이 시간 꼭 만나고 돌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름: 마르다와 마리아>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름에 관한 것 한 가지만 더 짚고 마치겠습니다. 마르다의 이름은 “주인”이란 뜻입니다. 집주인 마르다가 주인의 권리를 겸손히 예수님께 넘겨드립니다. 선하고 칭찬 받을 일입니다.

마리아의 이름은 “좋은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어보면 주님의 발 아래 있던 그 시간 “마리아는 바로(이) 마리아(좋은 것)를 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마리아를 택했다. 그리고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마리아는 지금 그 자리, 예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 그것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마리아가 자기 자신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생명을 얻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바로 이점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생에 대한 신비가 여기서 모두 풀립니다.

왜냐하면,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미 눅 10장 25절부터 시작하는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두 갈래 길로 설명하고,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꺼내놓습니다. 이 대목은 영생을 위한 이웃사랑 항목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하나님사랑에 해당하는 항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어찌되었건 누가복음서 기자는 이 복음서 말씀을 청중들이 경청하길 바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방법은 예수 앞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영생', 곧 하나님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디 서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목사, 장로, 기업인, 정치인, 대통령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 서 있는지 바로 알아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 말대로 개, 돼지가 아닙니다. 설령 개 같은 취급을 받고 있더라도, 개 속에 늑대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파멸 하지 않고 영원히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마리아를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 속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이 형상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상 그 무엇도 여러분을 해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일상의 노동과 예배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만 고민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지치고 상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먹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땀 흘리며 6일간 열심히 살다 이 자리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실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날 주님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영생의 떡으로 우리를 먹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과 성찬이 있는 곳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마리아가 그랬듯이 우리도 역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교회력설교)20160717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마르다와 마리아
눅 10:3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