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정녕 스님은 없는가?

moonbeam 2017. 10. 12. 10:42



나는 불교전문작가다. 우리말사전에 불교전문작가란 단어는 없지만 중앙 일간지 기자들이 내 책의 서평을 쓸 때 붙여준 이름이다. 작가를 어떤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 같아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지금은 훈장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돌이켜 보니 소설가가 된 이래 창작생활 대부분을 고승의 구도(求道)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만 발표해왔던 것도 같다. 중국의 지장보살 김지장 스님 일대기 <다불>, 한용운 스님 일대기 <만행>, 성철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 혜암스님 일대기 <가야산 정진불>, 일타스님 일대기 <인연>, 법정스님 일대기 <소설 무소유>, 한글창제에 간여한 신미스님의 일대기 <천강에 비친 달> 등등을 발간해 왔는데, 한 편당 취재와 집필기간은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5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고승의 정신세계를 천착한 지 30여 년이 계곡의 물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린 셈이다. 나는 내 서재의 의자를 스스로 선방 좌복으로 여기고 있으니 선방 아닌 선방에서 30년 이상의 세월을 우리나라 고승을 화두 삼아 보낸 것이다.

소설가 정찬주.

그동안 나는 일간지, 주간지 등에서 특정한 사건을 비판하는 칼럼을 자주 청탁받았지만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의, 주장하는 글은 내 성정에 맡지 않았을 뿐더러 시비란 본의 아니게 구업을 짓는 일이므로 극도로 경계해 왔음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꼭두새벽에 이른바 불교전문작가로서 ‘내 밥값은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내면의 질문을 받고는 또록또록 빛나는 새벽별을 보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사판의 세계는 으레 흙탕물이 좀 묻어 있으려니 해왔지만 불자들에게 정신적 상징인 방장으로서 존경받았던 설정스님께서 보여주고 있는 황당하고 참담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가치혼란이 왔기 때문이었다. 힘없는 서생(書生)인 나라도 아래 절로 내려가 법당 마룻바닥에 엎드려 쿵쿵 머리를 찧고 싶었다.

내가 스님을 처음 뵌 것은 2008년 나의 장편소설 일타스님 일대기 <인연> 출판기념회 장소인 부산 코모도호텔에서였다. 지금은 입적하시고 안 계신, 당시 동곡 일타스님 문중의 좌장이신 혜인스님께서 내게 “저 분이 내가 스님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설정스님이오. 보통 선승이 아니지요. 서울대를 나오신 지성과 지혜를 두루 갖춘 선승이오.” 하고 소개를 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단박에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 반사적으로 합장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경허스님의 이야기를 <한국인 경허>라는 제목으로 소설이든, 산문이든 집필하려고 구상 중에 있었으므로 수덕사에 가면 반드시 방장자리에 오르신 스님을 뵙고 경허스님에 대한 법문을 들으려고 했다.

이후 시절인연이 미흡했던지 수덕사, 정혜사, 천장사의 순례는 차일피일 미루어졌는데, 최근에 조계종 총무원장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서 스님을 다시 지면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설정스님에 대한 나의 짝사랑과 흠모는 흔들리고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법도의 길을 추구하던 스님께서 왜 사판의 수장인 총무원장이 되려고 하시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스님의 또 다른 방편인지 숨은 욕망인지 혼란스러웠다. 산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는, 문단 말석에 겨우 이름 석 자 등재한 하찮은 작가인 나도 공명심을 버리고 산 지 수십 년인데 어찌 방장까지 되신 분의 행보가 이래야만 하는지 어리둥절했다. 몇 백보 양보해서, 나는 스님의 행보가 단순히 총무원장 출마만이라면 격외의 고매한 뜻이 있으시겠지 하고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수행자의 살림살이에는 고하(高下) 미추(美醜)가 없고, 더욱이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도 늙은 거지가 되어 때때로 나투시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스님의 서울대 학력사칭은 무슨 청천벽력인가! 스님 자신이 작성한 이력서에 ‘1974년 서울대 농과대 수료’라고 적었다고 하니 기자들이 오기했거나 시봉하는 상좌들의 와전이라고도 볼 수 없잖은가. 세속의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을 선출하는데도 학력사칭은 중죄로 다스려 당선취소 판결을 하는데, 위없는 깨달음이야말로 생(生)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수행자의 분상에서 학력사칭의 도덕불감증에 내 마음은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인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하는데 참회하면 거짓말한 망어(妄語)의 허물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인지,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이 서울대를 나와 불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것인지 지금 이 순간 나는 하늘에 소리쳐 묻고 싶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와 같은 불의한 비법(非法)을 스님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이 불자들의 희망이 된 이유는 단 하나, 부단한 정진과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은 불기자심(不欺自心)의 진실성 때문에 아직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일대 학력을 사칭하여 동국대 교수가 됐다가 쫓겨난 신정아 사건은 종립대학인 동국대의 위상을 얼마나 추락시켰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런데도 위태위태한 조계종의 위상마저 명분도 없이 내팽개치려고 하니 눈앞이 캄캄하지 않을 수 없다. 설정스님의 학력사칭 말고도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으나 나는 솔직히 문제의 핵심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평생 재산 같은 것을 방관 내지는 포기하고 살아온 나로서는 가등기가 뭔지, 강제집행면탈이 뭔지 그 용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바보이자 문외한인 것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있다. ‘엎친 데 덮친다.’라는 속담과 비슷한 고사성어다. 스님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아 줄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스님이 없다는 것도 사실은 더 큰 문제이다. 스님 선대본부의 면면을 보니 나와 오랫동안 탁마해 왔던 낯익은 스님도 있고, 무엇보다  대부분 종단에서 중책을 맡아온 중진스님들이다. 이 분들은 설정스님의 학력사칭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인 듯하다. 그러고도 법문 때 전도망상(顚倒妄想)이란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서옹스님께서 살아생전에 내게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어도 산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작금의 스님들에게도 유효한 말씀인 것 같아 주변을 돌아보건대 한국불교의 미래가 암담할 뿐이다. 어쩌면 오늘 이후의 불자들은 낙심하고 절망한 나머지 스님이 있는 절로 가지 않고 집에 부처를 모시는 ‘절이 없는 불자’들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잔고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나부터도 그럴 것 같다. 중국의 당나라 양보는 부처는 집안에 있다는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을 남겼다. 평생 불교 관련 소설과 산문집을 발표해온 필자로서 눈앞에 추석이 다가왔는데 이처럼 우울할 수가 없다. 오늘은 비록 꼭두새벽에 새벽별이라도 마주쳤지만 내일의 둥근 보름달은 부끄러워서 차마 우러러볼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