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소요산

moonbeam 2008. 11. 1. 21:15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소요산 입구에 도착했다.

눈이 많이 와서 등산객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겨울에도 꼭 눈덮인 산을 가보려 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는데 모처럼 적당한 기회가 된 것 같았다.

상가도 거의 문을 열지 않아 썰렁하고 인적은 끊겨 우리 일행 3사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약간의 흥분한 마음으로 매표소 앞까지 간 우리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많이 와서 아이젠이 없으면 등산을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바로 어제도 사고가 나서 119가 출동했다는 것이다.

매표소를 지키고 있던 여자는 극구 말리는 눈치였다.

매표소에서는 아이젠이 없으면 등산을 하지 말라고 권했다.

매표소 안 옆에 앉은 남자가 전화로 이곳 저곳을 알아보았으나 아이젠을 구할 수는 없었다.

얼마 전 태백산도 아이젠 없이 그냥 올랐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한편으론 굳이 저렇게까지 말리는데 생각하고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 아이젠을 구해보기로 했다.

상가도 썰렁하고 그나마 열려있는 곳은 다 물어보았으나 아이젠을 구할 수는 없었다.

큰길까지 걸어 내려서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역시 아이젠을 구하지 못했고, 마침 배도 고프고 해서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김밥을 시켜서 먹고 최후의 보루인 소방서를 찾아갔다.

소방서 근무자들은 친절했지만 거기서도 출동용 아이젠 외에는 없다고 했다.

소방관은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로 될 수 있으면 산행을 포기하라고 까지 하며 우리를 만류했다.

바로 어제도 출동을 해서 4시간이나 헤매었다는 말도 덧붙이며....

그러나 일행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까짓것 뭐 한 짝 씩이라도 나눠 차면 되겠지....

한편으론 은근히 맘이 좀 좋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뭐, 그 정도쯤이야 하는 오기도 슬며시 치밀어 올라온다.

매표소에서 자재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말 그대로 눈만 보였다. 

 잎이 그대로 달려 있는 단풍 위론

하얗게 눈이 덮여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좌우의 계곡이나 걸어가는 길조차 온통 하얗게 뒤덮여서

온세상에 백색 밖에 없는 듯 했다.

逍遙山!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逍遙” 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한다.

얼마나 여유있고 멋드러진 말인가?

그저 한 수 위, 세속을 뛰어넘은 그 무엇!

치졸하지않고 그러면서도 그 잘남을 드러내지 않고

유유자적함이 그냥 스며있는 단어가 아닌가?

일주문을 들어가며 왼쪽 약수를 한 모금 마시니

세속과의 모든 것이 그대로 끊어지며 훨훨 아무 생각도 뜻도 없이

 저절로 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무아의 경지에 한발 빠지는 느낌이다.

속세와의 인연은 다리를 건너면서 어차피 끊어진다.

속리교! 이젠 내 모든 속세의 티끌은 없어지고, 나 또한 아무 것도 있지 않아 없는 것 같지만,

보이지도 않아 사라진 것 같지만, 또한 그대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에서 파묻혀 있게 된다.

 속리교를 건너 왼쪽으로 올라 돌아드니 “自在庵”!

 이 이름 또한 소요와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스스로 거기, 그냥 그대로 있음....

산과 암자의 이름이 하나다. 그저 떠돌다 자리를 하고 거기에 있으니.....

그저 정겹고 마음이 녹아들어 안락함까지 느껴진다.

자재암 뒤 절벽에는 눈덮인 落落長松이 그대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자기를 뽐내고 있다.

스스로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듯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I'm that I'm 같다.

그렇다! 어찌 인간이 암자를 지어놓고 그대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소나무야말로 自在松이라고 불려야 할 것 같다.

아니면 自在頌, 自在誦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자재암에서 하백운대로 올라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전에 왔을 때도 그 팍팍함에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역시나 그 가파른 길은 무척이나 나를 괴롭힌다.

게다가 온통 눈이 쌓여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그래도 난간이 있어 팔의 힘까지 빌어가며 올라갔지만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파른 산길을 돌아올라 하백운대에 오르니 비로소 산의 모습이 들어온다.

날씨는 너무 좋아 말 그대로 하늘은 淸明 그 자체였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서있는 겨울의 눈 덮인 산!

절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탄성이 흘러나온다.

하백운대에서 만난 소나무 한 그루....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구부러져 늘어진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그 순간 어디선가 광풍이 불어 나무를 뒤흔드니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

무조건 “우와”하는 탄성이 절로 솟아 나온다.

하백운대에서 중백운대로 가는 길은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라 별로 힘들지 않았다.

눈만 쌓이지 않았다면 단숨에 주파할 거리지만 눈밭을 오르락내리락 하려니 시간은 좀 걸리지만 그런대로 쏠쏠한 재미가 있다.

물론 히말라야나 백두산이나 다 여기 보다는 눈이 더 많겠지만

여기도 그에 못지 않다고 느껴진다.

거기에 아무리 눈이 쌓이고, 눈에 덮여 눈사람이 되어 굴러간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나에게는 이 소요가 다른 어떤 산보다도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다.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 눈밭을 만들고 산과 눈이 하나가 되었듯, 나 또한 하나로 그대로 빠져 녹아들고 싶다.

그렇다면 하늘과 소요와 내가 하나로 합일되는 것이 아닌가?

아아!! 쓸데없이 높은 경지를 상상하는 내가 오히려 우스워진다. 그렇게 되고자 하는 그것 조차도 내 속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역시 치졸과 유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바로 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기고, 부둥켜 잡고, 오르고,

내리고 하는 동안에 중백운을 거쳐 상백운대에 올랐다.

소요산은 해발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악산이라서 오르기가 쉽지 않다.

상백운에서 나한봉으로 가는 길에 있는 칼바위 능선은 마치 칼처럼 뾰족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시 눈이 쌓인 칼바위 능선은 적당한 긴장감을 제공해 준다.

좌우로 갈라놓아 어느 쪽을 보아도 거의 수직에 가까운 낭떠러지다.

완만한 능선, 구릉이라면 한번 굴러도 보고, 썰매도 타 봄직한데 눈이 쌓이고,

지형이 이런 상황에서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나한봉을 지나 정상인 의상봉에 오르니 산 아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에는 온통 군부대만 보인다.

헬리콥터가 소리를 내며 아래에서 날고 있어 높은 산은 아닌데 높은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산의 대부분에는 의상봉이란 이름이 많다.

거기엔 모두 먼 옛날 원효, 의상대사가 스쳐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꼭 전해진다.

원래 자재암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데....

옛날 스님들은 불도를 구하기 위해 천하 명산들은 두루 소요했으니 그 이름이 거의 산마다 박힌 것이리라.

원효, 의상이 바로 그런 스님들이 아닌가.

자재암은 원효가 짓고, 제일 높은 봉우리는 의상봉이고....

불교가 전해진 후로 원효와 의상이 우리의 불교를 지배하여 그것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의상봉에서 바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데다 미끄러워 공주봉을 올랐다가 내려가기로 했다.

공주봉!! 이름도 특이하다. 산봉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우리나라 산에 옛날의 로맨스가 스며들어 있는 일은 흔치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요산에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살아 남아있다.

요석공주가 원효의 환속을 기다려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에 머물면서 올랐던 봉우리가 바로 이 공주봉이겠지....

산의 입구에는 요석공원도 있으니 그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세월을 뛰어 넘어 우리의 가슴에 짙은 아쉬움을 남겨 준다.

우리의 강이나 바다나 이런 곳에는 사랑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만 산에 로맨스가 남아 있음이 많지 않음은 어쩐 일일까?

아마도 산은 예로부터 속세와 떨어진 또 하나의 다른 공간, 또 다른 세계라고 느꼈던 때문이겠지.

此岸에서야 사랑 운운하지만 그것이 彼岸에서는 인식되지않는 하나의 것이겠지.

아니면 피안에서는 필요치 않다든가..... 

공주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눈이 수북이 쌓여 미끄러웠다.

다행스럽게도 때로는 나무로, 때로는 동앗줄로 난간을 만들어놓아

미끄러운 대로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산행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내려오는 길은 그늘 이져서

한기가 스며든다.

미끄러지며, 뒤뚱뒤뚱하며 흰색 앞만 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낸 얼마 후. 원래 출발 지점인 속리교 위에 다다랐다.

이 다리를 건너면 티끌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가?

인생도 다리 하나 건너듯 이렇게 쉽게

이 세상과 꿈꾸는 세상을 넘나들 수 있다면....하는 바램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 현실에서 더 부대끼고, 한탄하며, 웃고 떠들며,

되지도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살아가야겠지..

 

눈밭을 헤매며, 눈 속에 파묻혀 보낸 하루였다.

산을 다 내려와 마을 입구에서 마시는 하산주 한잔에 피로는 눈 녹은 듯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한껏 여유롭고, 느슨해진다.

하산주를 다 마실 동안, 아니 집까지 오는 동안에도 눈밭에서 함께 하며 하루를 지낸, 젖은 등산화는 마를 줄을 몰랐다.

(2003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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