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아아...지리산...아아...천왕봉

moonbeam 2014. 11. 16. 23:02

11월 15일 새벽 3시쯤...

준비해간 밥과 뜨끈한 쇠고기무국을 먹고...

산행이 허가되는 4시 땡하며 중산리에서 출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해서

묵묵히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끈질기게 오른다...

가끔 돌아보면 반짝이는 불빛이 움직이며 따라온다.

움직이는 불빛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장 빠른 길이지만

영 재미없이 무조건 위로 위로 오르기만 하는 길이다.

보통 이런 길은 싫어하는데...

싫어하면서도 오늘도이 길을 택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지리산에 대한 목마름이 아닐까...

가고는 싶지만 쉽게 오를 수 없는 정상. 천왕봉.

오르긴 힘들지만 자꾸만 가고 싶은 곳...

어느 시인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기다렸다면

같은 의미로 지리산 정상을 갈망하는 마음이겠지...


천왕봉까지 바로 치고 올라가는 코스라 경사가 심해 힘들다..

갈수록 숨은 거칠어지고 다리는 팍팍해진다.

장터목 산장에서 밤을 지내고 오르거나

(예약이 별따기라 쉽지도 않고, 하루를 더 소비해야 하고...ㅜㅜ)

천천히 여유를 부리며 훤한 대낮에 오를 수도 있지만

짧은 시간을 투자하여 일출을 보려면 이럴 수 밖에 없으니...

아쉬운 생각을 접고 컴컴한 길을 묵묵히 오른다.

태양은 위대하다.

앞길을 환하게 보여준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고대인들이 태양신을 숭배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둠을 헤치며 계속 올라가 법계사 밑 로타리대피소에 다다른다.

화장도 고치고...

여기까지도 그랬지만 여기서부터는 계속 심한 오르막길이다.

그러나 평소와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정상에 가까운 곳이라 눈이 와서 얼음이 되었네..

그렇다고 아이젠을 꿰어찰 상태는 좀 아니고...

(오를 때는 스틱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나와의 약속은 지켜야 하고...ㅜㅜ)

그냥 오를 수 밖에...

힘든 산길이다.

훤히 보이는 낮에도 팍팍한 길인데

칠흑같은 밤이라 더 심하다.

가끔 몰아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나서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간다.


서서히 희붐하게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올라왔지만 보이는 산아래는 아직 어둑하다.

아득히 먼 곳에 누가 한 줄을 휙 그어 놓았을까...

아...아...아...붉은 직선...

(06:19)

개선문이라고 이름 붙여진 바위를 지나자 뭔가 달라지는 느낌...

천왕샘 바로 밑.

뒤를 돌아보니 뭔가 달라졌다.

아아...이제 떠오르려는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는 천왕봉 일출...

바로 밑 천왕샘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 아닐까...

솟구침, 터짐, 토해냄....그리고는 밝음, 환해짐...

가슴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동이다.

(07:04)

모든 것이 명명백백...

투명한 밝음 속에 살고 싶다. 

지극히 짧은 시간에 색깔은 바뀐다.

어둠에서 희부옇게 그리곤 발갛게 마지막엔 투명한 광명...

(07:06)

물든다는 낱말을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세상은 발갛게 물든다.

하얀 눈의 색깔이 붉게 변한다.

아름다운 모습, 색의 순간은 너무 짧구나...

(07:07)

그러고보니 어두움은 밝음으로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순환의 고리 안에서 반복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이다.

우리가 지금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둡다면

몇 발짝 앞에는 반드시 밝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07:29)

역시 천왕봉 바람은 쎄다...마구마구 휘날린다...

(천왕봉에서 액스트라 없이 독사진 찍기도 쉬운 일은 아닌데, 추운 날씨덕도 단단히 보는 행운ㅎㅎㅎ)

매운 바람과 빛나는 태양에 눈을 뜨기도 힘드는구나..ㅎㅎ

그래도 기분은 좋다.

몰아치는 바람 타고 하늘로 날아 오를듯...


능선을 따라 장터목으로 내린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 좌우편은 그냥 눈밭이다.

(08:16)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들의 향연은 언제 봐도 멋지다.

들이 마시는 숨에 찬공기와 함께 주목의 향기가 솔솔 들어 온다.


장터목에서 마누라님이 정성으로 싸 준 김밥을 먹고...

산장에도 여전히 바람은 센데 까마귀들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09:30)

재밌는 광경이네..

(아주 짧은 순간 배터리가 끝난다..날이 추워 빨리 방전이 되는듯..ㅜㅜ아쉽다...)

옆에서 사진을 찍던 친구가 자랑을 한다.

'제가 먹을 걸 줬거든요~~~그랬더니 춤을 추네요'

산에서는 누구와 만나도 스스럼이 없다.

특히 이렇게 높은 산에서는 그 누구와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좋다.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내리는 길은 눈밭이다.

이 길도 오를 때 무미건조한 길인데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북쪽 사면이라 눈이 그대로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산에 오를 때는 기술(요령)이고 내릴 때는 힘이다.

산사고는 내리는 길에서 많이 난다.

정상을 정복한 후의 안심 아니면 힘이 많이 빠진 몸상태 때문이 아닐까..

스틱을 챙기고 조심조심 경사가 심한 길을 내려 간다.

길다...

가도가도 끝이 없이 느껴진다.

올라오는 사람이 많아 고개를 갸웃하다가 피식 웃는다.

시간 개념이 잠깐 나를 헛갈리게 만든다..ㅎㅎ

아침 시간인데 머릿속 시간은 하산하는 오후 시간에 맞춰져 있으니..ㅋㅋ


계속 나오는 표지판은 백무동까지의 거리를 표시하고는 있는데...

산의 곳곳에서 거리를 알려 주는 이 표지판이 항상 맘에 안든다.

표지하는 이 거리는 평면도에서 나타나는 거리이기 때문에

실제 우리가 가는 길의 거리와는 차이가 많다.

경사도에 따라 그 거리 차이는 엄청나다.

(때마다 탄젠트 공식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ㅎㅎ)

나같은 경우는 경험에 의해 이 길이 어느 정도 가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초행일 경우에는 답답할 뿐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초보자들은 장거리 산행에 정신적으로 쉽게 피곤해지고

피곤해진 정신은 결국 몸에까지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연과학은 잘 모르는 완전 문과 체질인 내가 생각해도

현재 발달한 과학을 이용하면 손쉽게 걷는 거리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참에 모든 산의 거리표지판을 전부다 실제 거리로 표시했으면 한다.

그러면 등산객들에게 훨씬 더 편리하고 유용한 표지판이 될 것이다.

앞으로 가야 할 거리를 전혀 모르는 것과 실제 거리를 감지하고 가는 것은

정신과 육체 모든 면에 큰 영향을 준다.

예상할 수만 있다면 먼 길도 즐거움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우리 몸도 적절히 반응을 하여 대처할 수 있으니까..ㅎㅎ


지루한 내림길을 다 와서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씨원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여지껏 북서쪽 사면 그늘로만 내리다가 해가 비치는 곳에 다다르니

마치 봄처럼 포근한데...

마주 서 있는 둥그런 산은 가을을 물들이고 있구나..

(12:16)

함부로 볼 수 없다는 천왕봉 일출도 보고...

사람배경 없이 천왕봉에서 독사진도 찍고...

캄캄한 가을과 매서운 눈보라 겨울, 따스한 봄,

감이 익는 가을을 한꺼번에 다 느낀 하루.


아아...지리산, 아아...천왕봉.




'우왕좌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천사  (0) 2014.11.24
의상봉  (0) 2014.11.24
아아....백운대  (0) 2014.10.30
원효봉  (0) 2014.10.27
노고산  (0) 2014.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