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소나무가 뽑혔다고 간절한 기도인가

moonbeam 2015. 5. 18. 07:50

 

붙잡고 시작한 소나무가 뽑혔다고 간절한 기도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니 큰소리로 이웃의 새벽잠을 깨워도 된다?

 

‘산 기도를 가서 어린 소나무를 붙잡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끝내고 보니 그게 뽑혔더라. 기도는 그렇게 간절히 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젊은 시절 부흥회의 설교에서 이 같은 내용의 말을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부흥강사가 부럽기도 하고 한편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필자가 그와는 정반대 스타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불편을 완화하려고 몸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가만히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기도를 한다. 입술조차 딸싹이지 않고 묵언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사람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렘33:3) 했으니 기도는 큰소리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입술만 딸싹거릴 뿐 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나의 마음속 기도를 들으시고 닫혔던 태를 열어 잉태케 하셨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기도는 붙잡고 시작한 어린 소나무가 뽑히도록 몸부림을 친다고 간절한 것이 되는 게 아니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야만 간절한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조용조용 속삭이듯 하는 것도 간절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입술조차 딸싹이지 않고 묵언으로 해도 간절한 기도가 될 수 있다.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는 게 부르짖는 것이 맞지만, 기도에서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해 목이라도 조르듯이 하나님을 압박하는 것을 간절한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다.

 

옛날 필자가 평신도로 출석했던 어느 교회의 목사님께선 기도는 되도록 큰소리로 하라고 하셨다. 따라서 새벽기도라든가 심야기도 때면 기도소리로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조그마한 상가 2층에 자리한 교회의 도로 반대편 바로 옆에는 가정집이 하나 있었는데, 새벽기도 때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찾아와 항의를 하는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요지부동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그런 것에 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필자가 큰소리의 기도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기도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자기가 더 큰소리로 하면 된다 하였다.

 

전북 진안에는 말귀를 닮았대서 마이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바위산이 있고,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에는 돌탑으로 유명한 탑사(塔寺)가 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필자가 가끔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번은 그 탑사 입구 길가 공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물콧물을 흘리는 가운데 돌을 쥔 주먹으로 땅을 치며 큰소리로 울부짖어 기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흘끗흘끗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지나갔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가는 길가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사랑의 첫 단계는 타에 대한 배려인데, 새벽기도로 곤히 잠든 사람들을 깨우고,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길옆에서, 그것도 사찰 근처에서 추태에 가까운 모습으로 울부짖어 기도하는 것을 보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마음이 되실까 싶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골방은 장소로서의 공간을 의미하진 않는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모아 기도드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골방이 된다. 시장 복판도, 만원 버스 안도 골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두컴컴한 진짜 골방이라 할지라도 기도할 때 마음이 분산된다면 기도의 골방은 되지 못한다.

‘은밀’이라 함도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가운데’라는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가 봐도 상관없다. 백 명이 봐도 천 명이 봐도 상관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행해 하면 은밀한 기도가 된다.

 

 

죽음보다 가혹한 고통의 쓴잔을 면하기 위한 기도

 

필자는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죽음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을 받는 것 같은 삶을 살아야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그러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추석날이었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높은 산 밑에 있는 기도원으로 갔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바람에 구름이 필자를 스치며 휙휙 지나갔다. 마음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래도 기도는 해야 했다.

그러나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도 산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필자에게는 영적으로 커다란 결점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대낮의 예배당 안에서조차 안에 사람이 없으면 기도를 할 수 없었다.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아서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산기도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큰 위기가 자신을 덮치고 있었으니. 필자는 죽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산으로 갔다. 그런데도 멀리는 올라가지 못하고 교회당 종탑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기도를 마칠 수가 있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길이 없어질 때까지 골짜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평평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했다. 밤이면 일부러 늦은 시간이 되어서 올라갔다. 그게 긴장감을 더해 기도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분 나쁜 짐승소리와 나뭇잎에 맺힌 찬이슬이 맨살 위로 떨어질 때면 선뜩하여 싫었지만 기도에 지장은 되지 않았다.

그 후로는 거기가 오전, 오후, 밤의 하루에 세 차례씩 하는 기도의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의 기도는 며칠인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밤도 당연히 다른 날과 다름없이 그리로 갔다. 그리고 기도 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기도를 접고 일어나라. 네 앞의 잔을 피하지 마라’ 하는 음성이 가슴으로 들렸다. 실제의 음성은 아니었지만 귀로 듣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가슴으로 들렸다. 자신의 의지로 거역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음성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그대로 일어나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의 마음은 마치 진공상태와도 같았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 같은 것도 일지 않았다. ‘기도를 좀 이루어 주시지’ 하는 약간의 섭섭한 마음이 그냥 허허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마음이 파랗게 느껴졌다.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달빛의 푸르름처럼 시각적으로 푸르게 보였다.

그날 밤으로 집에 돌아온 필자는 그런 허허한 마음으로 얼마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필자의 머리에 성경의 한 장면이 생각나고 있었다. 떠오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인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했고,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그러나 진짜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시고 순종만 받으셨다.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였던 것이다.

순간, 필자의 가슴은 기쁨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산 기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순종만을 받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잔을 들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기도를 할 수 없게 되고만 것이다. 기도를 하려고 자리에 앉기만 하면 잠이 쏟아져서 단 30초도 집중해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10시간씩을 잠을 자도 마찬가지였고, 벽면에 이불을 쌓아 놓고 물구나무를 선채로 그에 기대서 기도를 시도해 봐도 잠이 쏟아졌다.

그런데 어쩌랴. 죽음의 형벌보다 더 무서운 잔을 마시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기도밖에 없는데. 그날부터 필자는 잠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아니 사단과의 전쟁이었다. 필자는 기도만 하려 하면 그토록 잠이 쏟아지는 현상을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단의 방해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기를 쓰고 기도에 매달리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조차 없었다. 눈꺼풀이 내려앉아 30초도 이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매달릴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시도하고 또 시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기도 아니면 죽음보다 가혹한 형벌 같은 잔을 마시며 살아야 하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기를 며칠이나 계속했을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기도를 시작했는데도 졸지 않고 계속할 수가 있었다. 배가 고파야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도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두어 시간씩 하는 것이 보통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런 것을 성령체험이라고 하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신비스러운 체험도 다양하게 했다.

 

고통의 쓴 잔을 마시며 살지 않게 해 주시라고 하는 기도는 필자만 드린 것이 아니다. 필자의 아내도, 아니 아내는 더욱 열심히, 그리고 많이 기도했다. 밤 11시가 되면 교회당에 가서 기도를 시작하여 새벽기도가 끝나서야 돌아오기를 3년간이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했다. 잠은 초저녁과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조금씩 잤다. TV는 있어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동안 아내도 성령체험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많이 했다.

하지만 필자나 아내나 그 성령체험이라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그런 것을 더 체험하기를 바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싸인 정도로 생각하려 했다. 다만 그런 체험을 하게 되면 기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어 좋았고,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에 확신을 더해 주어 좋았다.

그렇게 한 기도 덕분에 필자 부부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신앙이 조금은 성장할 수가 있었다. 욕심도 조금이기는 하지만 덜어낼 수가 있었다.

 

죽음보다 가혹하게 쓴 잔이 필자에게 닥쳐 온 처음의 두어 달 동안, 크지 않은 편의 체구인데도 필자는 심적 고통으로 체중이 9k가 줄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쓴잔을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를 드리며 즐겁고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 주신 쓴잔을 순종함으로 받았기에, 그리고 기도했기에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쓴잔도 순종으로 마시면 신앙의 자양분 풍부한 은총의 잔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사, 또 감사한 일이다.

 

 

기도는 육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도구인가

기도하라는 권면은 많지만, 무엇을 어떻게 구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다. 구할 것을 말한다 해도 육적 필요를 채워 달라고 하는 구복신앙적인 것들뿐이다. 예수께서 기도의 본까지 제시하시며(마6:9-13 주기도) 기도에 관해 가르쳐 주셨는데도, 그것은 그냥 성경에 쓰여 있는 말일뿐, 자신이 하는 기도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무시하는 일이 많다.

 

예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기 전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더하여 육적 필요까지도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육적 소용을 기도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고도 말씀하신다. (마6:31-33) 그런데도 왜 죽자 살자 육적이어서 구복신앙적인 것들에 목을 매는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일용할 양식을 너무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는 데에 있다. 물론 현대는 옛날의 농경사회와 달라 의식주만으로는 삶다운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자식들 교육도 시켜야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것으로도 부요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일용할 양식이다. 빠듯한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넉넉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부요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물질이 됐건 사회적 지위나 출세가 됐건 그것에 목을 매는 사람은 아무리 모으고 높이 올라간다 해도 소금물을 들이킨 사람처럼 갈증이 심해질 뿐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하신 것이고, 그리하면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배가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장소도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니 지정된 곳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니 필자는 기도를 주로 집에서 한다. 어떤 목사는 집에서 100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1분 하는 것이 낫다고 하지만, 필자는 교회에서건 집에서건 어디서건 편한 자세로 집중하여 할 수 있는 곳이 가장 좋은 기도처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콧구멍만한 서재에는 항상 두툼한 요가 둘로 접혀 한쪽 벽에 붙게 깔려 있고, 그 위에는 커다란 베개가 하나 벽면에 닿게 세워져 있는데, 거기가 필자의 기도자리이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하루에 몇 번씩 거기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그때가 필자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베개에 기대어 가장 편한 자세로, 그러나 마음의 무릎을 꿇고 앉으면 소몰이가 소를 몰듯 자신을 여기까지 몰고 와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온몸을 감싸 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후끈해지기도 한다.

 

필자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부를 위해 기도한다. 모두가, 자신과 둘이서 물에 빠졌다면 자신이 죽어 살리고 싶은 존재들이다.

 

70평생을 살았으니 이제 바랄 것도 별로 없다. 늙어 도움만 받고 있을 뿐 자식들에게도 해 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 욕심을 내려놓기가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욕심을 내려놓기 쉽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특권이자 은총이다. 그러나 그런 은총을 누리지 못하면 욕심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 노욕이라는 마물(魔物)에 사로잡혀 추한 꼴(老醜)이 된다. 젊어서는 욕심이 과하다 싶으면 브레이크를 걸어 자제할 수 있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판단력이 흐려져 브레이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리 부부가 둘 다 가능한대로 건강하게 살다가 지금보다 나아진(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라고 기도드리고 있다. 일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다가 일할 수 없으면 데려가 주시라고 기도드리고 있지만, 일에 대한 욕심까지도 많이 내려놓았다.

 

오늘도, 희미할 지라도 빛을 내고, 여릴지라도 향기를 내며, 조금일지라도 소금으로 녹아져 다른 사람의 삶이 맛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해 주시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삶이, 그런 일상이 참 행복하다. 젊었을 때는 느끼지 못해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