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효자 대통령의 비극 --- 서민

moonbeam 2015. 10. 30. 10:04

“김극일 (金克一)은 조선시대 김해 사람으로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었다.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할 때 극일은 입으로 상처를 빨아 낫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는 대변까지 맛보며 간호를 했다.”

효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다. 인터넷이 없던 조선시대에도 효자에 관한 미담은 도의 경계를 넘어 전국에 회자됐고, 나라에서는 이들을 불러 표창하기도 했다. 이렇듯 효자는 해당 지역의 자랑이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효자의 인기가 그전만 못한 느낌이다. 여성들 사이에서 효자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이트 도중 별 일 아닌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집에 가버리는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여성들은 이런 남자들을 ‘마마보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서민 교수

더 큰 문제는 결혼 뒤에 발생한다. 효자남편과 결혼하면 시부모를 모셔야 하거나 그에 준할 만큼 시댁에 잘 해야 하니, 아내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과거와 달리 요즘엔 효자가 직접 몸으로 뛰기보단 아내를 시켜서 효도를 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 것도 부담을 가중시킨다. 인터넷에서 ‘효자남편’을 검색하면 숱한 미담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결론이 “효자남편은 싫다”고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김극일이 직접 아버지 대변을 맛보는 대신 아내에게 시켰다면 그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하지만 지금 효자들은 하나같이 바빠, 온갖 수발을 아내에게 시킨다. 그러다보니 다음과 같은 일도 생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대신 집에서 모시는데, 대소변을 받아내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다. 효자남편은 밤늦게 집에 와서 “이렇게밖에 못 모셔?”라며 아내를 타박하는 것으로 효성을 과시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낳아주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까지 정성스러운 제사상을 차리게 하니, 명절까지 합치면 아내 허리가 휠 지경이다. 아내들이 효자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높은 사람, 예를 들어 대통령이 효자면 어떨까? 아랫사람은 당연히 피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들까지 피곤할 수 있다. 하필이면 지금 대통령께선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 가장 효성이 지극한 분이다.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대통령의 효성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아버지에 관해서는 기억력이 출중해서, 아버지 욕을 했던 사람은 잊지 않고 뒤끝을 작렬시킨다.

문제는 대통령의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대통령을 하신 박정희라는 점이다. 다들 알다시피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다음과 같은 전력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일본육사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를 썼고, 졸업 후 관동군 중위로 활동했다. 해방 후엔 북한을 추종하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인 신분을 박탈당한 적이 있고, 쿠테타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했으며, 영구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해 욕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하도록 했다.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공과를 따져서 객관적으로 해야지, 무조건 숭배만을 강요해선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6년도 예산에 대해 시정연설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대통령께서는 나이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자라나는 세대만큼은 아버지를 숭배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산적한 이슈도 많을 텐데 갑자기 교과서를 국정화하자고 들고 나온 것도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해야 했고, 또 아버지 탄생 100주년인 2017년에 맞추려면 지금부터 서둘러도 늦다는 인식 때문이었으리라. 벌써부터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얘기를 흘리는 걸 보면 앞으로 만들 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새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이들이 사회로 나갈 때쯤엔 곳곳에 박정희 동상이 만들어지고, 박정희를 신처럼 추종하는 종교가 생기지 않을까? 난 국정화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기존 검정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국정화를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니까.

하지만 국정화 방침을 먼저 정한 뒤 거기에 맞는 논리를 억지로 만들려다보니 모두가 피곤해진다. 그 결과 역사학자들이 국정화 반대 서명을 하고, 국정화에 관심이 없던 국민들마저 찬반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대통령 뜻이라면 무조건 받드는 새누리당이 “현 교과서는 주체사상을 가르친다”며 예의 색깔론을 펴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사태를 초래한 건 다 대통령의 효심, 앞으로 대통령을 뽑을 때는 효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따져본 뒤 선택을 하자. 효자 대통령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