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아이유와 국정교과서

moonbeam 2015. 11. 11. 21:10

아이유의 ‘제제’는 음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별로 흥미롭지 않다.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익숙한 클리셰일 뿐 신선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예술에 가깝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를 둘러싼 반응과 논란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국내 출간한 출판사 동녘이 보도자료를 낸 게 시작이었다. 누리꾼 일각에서는 이 노래가 소아성애를 그리고 있다며 아이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이유는 자신의 SNS에 직접 사과문을 올렸다. 아무 소용없었다. 급기야 포털 사이트에 ‘제제’ 음원 폐기 요청을 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흥미롭다고 했지만 사실 불쾌하다. 화가 난다.

‘제제’가 누군가에겐 성공한 예술일 수 있다. 노래가 좋다고, 뮤직 비디오가 예쁘다고 느낄 수 있다. 당연한 것이다. 반면 나처럼 이 노래가 별로고 뮤직 비디오도 새로울 게 없다고 느낄 수 있다. 모든 예술이란, 대중문화란 으레 그런 것이니까. 예술 또는 표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수록 좋다. 하지만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어떤 평가와 의견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자신과 다른 그 어떤 의견과 해석도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다. 그런 다양한 의견 속에서 예술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금기에 도전하며 세상을 환기시키고, 아름답지 않았던 것을 아름다움 속으로 끌어들인다. 모든 예술은 곧 정치적이지만 그 말이 예술을 정치적, 윤리적으로만 해석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제제’를 둘러싼 논란의 잣대는 무엇인가. 윤리다. 이데올로기다. ‘좋고 나쁨’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다. 이진법의 잣대로 어떤 문화 현상을 재단할 때 벌어졌던 일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애국과 매국이 있었다. <디 워> 때가 그랬다. 국익과 진실이 있었다. 황우석 사건 때가 그랬다. 그 일들을 겪으며 우리 사회 안에 잠들어 있던 파시즘이 고개를 들곤 했다. 원작의 캐릭터를 잘못 해석했다고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출판사, 이에 호응하여 음원폐기를 주장하는 집단으로부터 그때의 광증을 다시 한번 느낀다. 파시즘은 이렇게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친다.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양성이라 늘 믿어왔다. 다양성이란 나와 다른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혹은 인정할 때 생겨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나의 트렌드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한다. 인구의 5분의 1이 한 영화를 보고, 비싼 패딩이 교복처럼 팔린다. 끼지 못하면 배제당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배제당하기 싫어 다른 생각을 배제한다.

그 결과 다른 것은 곧 틀린 게 된다. 다름과 틀림이 오용되는 데는 이런 무의식이 깔려 있을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를 지향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나치가 그랬고 북한이 그렇다. 교과서 국정화의 가장 큰 문제점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를 오직 하나의 시각에서 다루겠다니, 얼마나 위험한가. ‘이 노래는 소아성애를 예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는 논리가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는 정부·여당과 다를 게 뭔가. 백번 양보해서 ‘제제’에 소아성애에 대한 상징이 깔려 있다 치자. 하지만 그게 이 노래가 분서갱유당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비판할 수 있다.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제해서는 안된다. 표현의 자유에 윤리가 개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윤리만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 권리가 일상화되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삭막한 자기 검열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침대에 사람들의 다리 길이를 맞추던 프로크루스테스의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제발 표현의 자유를 상자 안의 벼룩으로 만드는 일을 멈추라. 당신들의 윤리가 곧 모두의 윤리라는 착각을 멈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