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이러려고 ‘타협’했는가 --- 신주백 연대교수

moonbeam 2016. 1. 1. 09:14

을미년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도 한·일관계는 뜨겁다 못해 폭발 직전이다. 양국 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 내용’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법적 책임을 명시하지 않았으며 일본 외무상이 ‘대독 사죄’를 했다는 점을 들어 굴욕적 합의라고 규정한다. 옹호하는 이들은 ‘한·미·일 동맹’의 현실과 아베 정권을 상대로 이만큼 합의한 것도 최선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해법을 지향하는 주장과 현실론 사이에 큰 간극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아베 정권의 행적을 고려할 때 이번 회담에서 근본적인 해법에 다다를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3월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나라에서 한국을 삭제했다. 4월에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기술하도록 지도한 중학교 교과서의 검정을 통과시켰다. 아베 총리는 미 의회에서 ‘희망의 동맹에’라는 주제로 연설하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7월에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군함도 등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면서 어떻게든 강제동원에 관한 언급을 넣지 않으려 노력했다. 8월에 아시아·태평양전쟁 때의 행동만을 사죄했지, 그 이전의 행위를 정당화한 아베 담화를 발표했다. 10월에 한국을 방문한 방위상은 “한국의 지배가 유효한 범위는 휴전선의 남쪽”이라고 발언함으로써 일본 측이 해석하고 있는 한일기본조약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베 정권은 2015년 내내 자신의 원칙과 역사관을 바꾼 적이 없다. 한·일관계의 진정한 현실은 이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이러한 현실에서 일본 정부가 예산 10억엔을 지출해 재단을 설립하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며 합의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판단의 대상은 10억엔의 재단인 것이다. 합의문 어디를 보아도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기시다 외무상이 합의 직후 일본 기자들에게 “일본이 잃은 건 10억엔뿐”이라고 말한 것은 말실수가 아니다. 이번 합의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했고 총리가 ‘사죄’했음을 평가하는 태도는 립서비스에 취한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처신이다.

아베 정권은 12·28 합의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고, 역사관을 바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익이 반발하고 있다고 한국 언론에서도 보도하고 있지만, 아베 정권은 최대 우익 조직인 일본회의를 통해 얼마든지 관리할 수 있는 장악력이 있다.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큰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 책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됨에 따라, 자신이 밀어붙이고 있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대중국 견제 전략에도 힘을 실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의도치 않게 역사수정주의를 강화하는 아베 정권의 원군(援軍)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역사갈등을 축으로 긴장을 확대시키는 데 동조하는 꼴이 되었다. 

반면에 합의문대로라면 12·28 합의를 통해 한국 정부가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미래를 구상했는지 모르겠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것에만 한정할 수 없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한·일 간에 제기된 여러 역사문제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핵심 사안이다. 탈식민을 통해 동아시아 다자외교의 틀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논점이다. 오늘날의 여성 인권과 일반적인 인권보호 문제로까지도 확장성을 갖고 있는 보편적 주제이다. 하지만 12·28 합의는 현재를 논의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동력을 결정적으로 꺾어버렸다. 

더구나 최종의 상징인 재단을 한국 정부가 운영한다. 피해자들이 반발하는데도 밀어붙일 기세다. 앞으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줄세우기도 하려 들 것이다. 이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주요한 갈등은 한·일 간에서 우리 내부로 전환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에 따라 국제협력은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힘들이지 않고 코를 푼 셈이다. 12·28 합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미래를 내다보지 않은 채 화약을 껴안고 우리 안으로 들어온 폭탄인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에게 ‘대승적 견지’를 말한다.

<신주백 | 연세대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