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중얼

걸어서 하늘까지

moonbeam 2004. 8. 24. 14:17

오래 전부터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고 싶었다. 로맨틱한 생각이었지......

넓고 푸른 강 위를 여유 있게 걸어서 건너고 싶었고

걸어가는 그 과정에서 차를 타고 쌩하니 지나가면서 느끼지 못하는 느림을 맛보고 싶었다.

강다리 위에서 진짜 무공해의 강바람을 맞고 싶었다. 

 

 

퇴근을 해서 강서 지구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개화산 자락을 돌아 88대로 밑의 토끼굴을 지나면 바로 공원으로 들어간다.

차들이 서로 교행하며 얽혀 있는 토끼굴을 빠져 나오면

여의도에서 죽 연결되는 공원 산책로가 나온다.

탁 트인 강가의 공원은 굴을 나오자 시원함을 더해준다..

다만, 공원으로 진입하는 길이 좀 더 편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왼 쪽에는 여의도에서의 거리를 나타내는 13Km의 이정표가 서있다.

이정표를 지나면 이따금 싸이클을 타고 휙 지나가는 몇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산책로가 이어 진다.

강가 쪽으로는 생태 습지 공원이 조성되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우거진 풀 사이로 들어온다.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바라보는 방화 대교의 모습도 아주 멌있다.

그 뒤론 북한산의 모습도 보이고...

 

다리 쪽으로 갈수록 파밭이 이어 진다.

작은 한 뼘의 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일진대 강가의 넓은 땅을 그대로 둘 리가 만무하다.

장마가 들면 그대로 물에 잠기기 때문에 시기를 잘 맞춰서 알맞은 농작물을 재배해야 하는 곳이다.

             

차가 씽씽 달리는 다리 밑에서 작은 언덕을 오르면 지금은 쓰지 않는 옛 행주 다리로 오르게 된다.

차로 달릴 땐 1분이면 건너는 다리가 저 멀리 아득하게 끝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逍遙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재주가 없어서 吟詠까지 하지는 못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냥 걷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逍遙가 좋다.

마음이 통하는 知人과 아무 이야기나 주고받으면서 걷는 것도 즐거움을 더해 준다.

까짓것 吟詠을 못하면 어떠랴...

되지도 않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어떠랴...

아무 생각이 없으면 어떠랴....

가까운 사람이 곁에 없으면 어떠랴....

이렇게 즐기며 걷는 것 만 해도 얼마나 큰 기쁨인가!

 

차를 타고 1분 안에 건너는 다리는 앞으로만 벋어 있다.

그러나 강바람을 맞으며, 갈매기 나는 것을 보며 건너는 다리는 나의 앞과 뒤 어느 방향으로든 다 열려 있다.

뒤로 돌아서 내가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볼 수도 있고 옆으로 한눈을 팔아 도도한 강물을 퍼 올릴 수도 있다.

더욱이 요즘같이 날씨가 좋을 때면 다리 한가운데 누워 눈이 시리도록 하늘을 바라보고 내 가슴에 품을 수도 있다.

얼마나 멋진가!!!

 

강다리 위에서 맛보는 벅차오르는 느낌은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다.

더구나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는 옛 행주 다리는 그야말로 나 혼자만을 위해 있는 게 아닌가!

                  

지금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이 콘크리이트 구조물에도 생명들은 살아 숨쉬고 있다.

어디에서 날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갖가지 풀들이 아스팔트 위로 고개를 내밀고

예쁜 꽃 까지도 한 구석에 피어 있다.

그 빨간 색에 나는 매료되어 한참을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너 오른 쪽으로 다리 밑을 끼고 돌면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 주는 철책이 나온다.

요즘 같은 세상에 행주 다리부터 김포 다리 까지는 철책이 필요 없을 법도 한데

밥그릇 수가 줄어 들까봐 없애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 데 없는 생각도 해 본다.

철책을 따라 가다가 군부대가 있는 곳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돌면

자유로 밑을 관통하는 토끼굴이 나온다.

                 

토끼굴을 벗어나면 그 곳부터는 논길이다.

그렇게 걱정했던 벼도 이제는 누렇게 익어 가고 있다.

벼가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들판의 색이 변하는 것을 보니 또 한 해가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또 그렇게, 그냥 그렇게, 아무 한 일 없이 나이만 하나 더해지는 것 같아 잠시 허망해 짐도 느꼈다.

가끔 먼지를 피우며 지나가는 자동차만 아니라면 논길은 푸근해서 좋다.

때가 때인지라 거두어들인 농작물을 가득 실은 차들은 풍요를 안고 바쁘게들 지나간다.

 

일산의 들판에서는 파 농사가 대부분이다.

파를 뽑아서 깨끗하게 다듬는 일은 주로 나이 먹은 할머니들의 몫이다.

이제 다음 세대엔 누가 저 일을 할까?

젊은이들이 사라져 가는 농촌의 현실이 안타깝다.

비닐하우스의 시금치도 깨끗이 정리하여 아예 포장까지 해서 트럭에 싣고 간다.

그냥 뽑은 채로 가면 가게에서 다듬어서 상표를 붙이는 줄 알았는데

지나가면서 보니 밭에서 완벽한 상품을 만들어 납품을 하는 모양이다. 

            

논길 따라 가는 길옆에 핀 맨드라미가 정겨웠다.

논길에는 주로 콩이나 가지 등을 많이 심어 놓았는데 맨드라미가 피어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우리 어릴 때엔 마당에 있는 꽃들이 주로 채송화, 분꽃,

나팔꽃, 붓꽃, 봉숭아, 깨꽃, 다알리아, 칸나, 해바라기 등과

맨드라미 같은 것들이었는데 요즘 화단에서 이런 꽃들을 보기는 힘들다.

그런 가운데 맨드라미를--그것도 논길에서--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길옆에 어깨 정도 까지 오는 흙더미가 있었는데

거기에 파묻힌 은행나무에서 잎이 돋아나 있는 것도 신기했다.

 

 

지난 주 처음 걸어왔을 때는 날이 환했었는데 이제는 일산에 도착하면 어둑어둑해진다.

해가 그만큼 짧아졌나 보다.

깊은 숨을 내쉬며 바라본 서쪽 하늘엔 아름다운 노을이 짙게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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