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중얼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며

moonbeam 2005. 2. 26. 20:34
지난 토요일...정말 오랜 만에 시내에 나갔다...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결혼식 주례를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찍 나가서 시청 앞 근처의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
진한 커피를 앞에 두고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하면서 혼자 시간도 보냈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을 때 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 회피하려고 하지만
워낙에 마음을 먹고 찾아오는 친구들이라 쉽게 거절하기도 힘들다.
그렇게 어영부영 주례를 선 것이 벌써 다섯 번이니....

주례를 설 때 마다 당황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며
과연 내가 이런 자리에 서도 될까? 하는
부끄러움에 안절부절 못하기는 매번 마찬가지다.
벗겨진 이마라는 대단한 외모는 괜찮은데 문제는 내 삶의 모습이 아닌가?
도대체 내가 얼마나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과연 나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모범적이며,
우리 가정 또한 얼마나 모범적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내가 바라는 결혼 생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로 한다.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듯 하니까
훨씬 마음도 편하고 부담도 줄어드는 것 같다.
그러면서 매번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어 오히려
나 에게 보탬이 되는 것 같다.

점심을 같이 먹어야 했지만 혼주의 요청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원래 맘먹은대로 식이 끝나자마자 기념 촬영만 하고 바로 나왔다.
시청 앞 분수대는 힘찬 물줄기를 파란 하늘로 쏘아대고 있었는데
옆 화단의 철쭉은 때도 모르고 붉게 피어 올랐다.
시청앞에서 지하도를 건너 덕수궁으로 들어 갔다.
마침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 로댕 갤러리에 온 이후 딱 일년 만이다.
바쁜 일이 없는 터라 느긋한 마음으로,
그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무언가 푹 빠진 표정을 하고
미술관을 돌았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여유를 마음껏 즐겼다.
마침 뒷문도 닫혀 있고, 원래의 생각대로 다시 정문으로 나왔다.
토요일 한낮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다.
하늘은 눈이 부시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바람은 상쾌함을 더해 준다.
얼마나 멋진 가을인가!!!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하는 인간적인 예의를 버린 것도
이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언제 또 다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또 한 일년 쯤 후가 되지나 않을까?
아니 일년 뒤에 꼭 이런 기회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을까?

바람결은 정신까지도 쇄락하게 만들고,
바람따라 구르는 나뭇잎들은 재잘대며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잎들은 자기 색깔을 넘어서 투명하기까지 하다.
덕수궁 길에는 빨간 단풍보다는 노란 색이 많다.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 입은 여학생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천천히 걷는 젊은 秋男秋女들은 너무 멋져 보인다.
내가 나이가 들었음인가?
그저 보기만해도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오르고 기분이 좋아진다.
보이는 것 모두가 축복이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카메라를 가지고 올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 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 졌다.
강한 돌풍에 날려 하나가 내 이마를 때렸다.
그 순간!! 아 가을이구나 하고 깊이 느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가을임을 알고 있었지만
내 이마를 때린 나뭇잎 하나가
이 가을을 통째로 나에게 던져 주었다...
아아!!! 정말 가을이구나!!!!


가을을 만끽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말씀사에 갔다.
마침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준비할 때라 악보를 골라야 했다.
우리 교회 수준에 맞게 좀 쉬운 곡을 선택해 사고,
새롭게 결혼한 신랑 신부에게 줄 책도 몇 권 샀다.

여유롭게 걸어 다니다 보니 배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인 내가 밥 때도 넘기고 그저 돌아 다니기만 했으니...
광화문에 나오면 가끔 들르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이 몇 있다.
광화문이란 중국집이 좋았는데
그 골목 자체가 재개발 중이라 옛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새문안 교회 옆에 신문각이란 중국집으로 갔다.
고픈 김에 자장면 한 그릇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리고
밖으로 나오니 그 만족감이란....
천하를 다 준대도 필요없고, 나에게 이 순간의 만족만큼 큰 것은 없었다.

엉덩이가 시린 줄도 모르고 세종문화회관 돌계단에 멍청히 앉아
시간만 죽이다 집으로 돌아 왔다.
버스 차창에 기대어 오는 동안 내내 내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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