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서원에서 텅빈 마음을 안고 그러나 입으로는 계속 흥겨운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대원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날이 쨍하게 맑은 것도 아니고 구름이 약간 있어 후텁지근하여 걷기엔 그리 좋지 못하다.
자꾸 새나오는 유행가때문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누가 봤으면 더위 먹어 실성한 놈 하나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무작정 걷는 걸로 알기에 딱맞다.
대원사는 종주 코스에서 내려오기엔 좀 길지만 그 풍광으로는 최상이다.
그 위로 유평마을도 있어 지친 산행을 마무리 할 때 지루하지 않아 좋다.
게다가 대원사를 지나 내려오는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숲은 우거지고 계곡물은 그지없이 맑고...
계곡 바로 옆에는 야영장도 있어 가까이에서 물은 만져볼 수도 있다.
참 좋은 길이다.
종주 코스의 마지막 종착점으로는 환상이다.
그간의 피로를 깨끗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덕천서원에서 두 시간 반 정도 걸어 대원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물론 대원사 바로 앞까지 차가 들어가지만 차를 가지고 간다 해도 주차장에 세우는 것이 좋다.
차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을 한 20분 걷는 산길이 준다.
참 좋은 길이다.
절대로 차는 가지고 올라가지 말 것....
오르면서 카메라를 꺼내어 몇 장 찍다가 내려올 때 찍기로 했다.
어차피 다시 내려올 것이니까 올라가며 눈도장 찍어 놓았다가
멋진 곳만 엄선해서 찍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일까...
아...그러나 그런 잔꾀가 얼마나 허무한 일일 줄이야...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어떤 일이든 기회가 주어질 때 실천에 옮겨야 한다.
꾀를 부린다든가 다른 핑계를 대어 다음을 기약하다 보면 그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일주문 옆은 너른 계곡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어 물의 감각을 만지며 느낄 수 있어 좋다.
내려올 때 발을 담그면 그 맛이야....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
방장산은 지리산의 별칭이지. 두류산도 마찬가지고...
대원사는 아픔의 절이다. 우리 역사의 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임란 때 불로 소실되었고 여순반란사건 때도 전소되었다...
거기에 수많은 비구니들의 한(?)도 쌓여 있으니....
그 뭉친 한을 주위 경관이 해소시켜 준다...
나는 이 석탑을 찍고 싶었는데 비구니 참선 수련장이라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다.
별 수 없이 아래쪽에서 보이는 윗부분만 겨우 찍었다.
영 기분이 그렇다. 그럴 수는 없지...
밑져야 본전 아닌가. 청이나 함 넣어 보자.
또 엄정한 불가에서 이 무지몽매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까.....
바로 옆 종무소라 쓰인 곳을 보니(별다른 사무실 분위기가 아니고 그냥 방 한 칸이다)
비구니 한 분과 보살 한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최대한 정중하게 '저 위에 있는 돌탑 사진을 좀 찍고 싶습니다.'
잠시 멈칫 하며 눈짓을 교환하더니 '사진만 찍으실 거죠?'
'네 방해는 전혀 하지 않고 사진만 몇장 찍고 내려 옵니다'
방 밖으로 나온 모딜리아니 같이 가녀린 보살이 따라온다
고리를 걸어 놓은 문 앞에서 내가 앞을 양보하자 보살이 문고리를 올리고 앞선다.
보살은 따라 올라와 탑을 보며 계속 합장을 하고...
나는 사진을 찍고...
특이하게 기단의 모서리 부분에 기둥 역할로 인물상을 조각했고(내가 볼 때는 문인상인듯)
사면에는 사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중건되었다는데 특별한 양식이란다.
사진을 찍고 내려와 대웅전 뒤로 돌아가니(나는 절에 가면 꼭 대웅전이나 다른 건물의 뒤안을 찍는 버릇이 있다.)
비구니 하나가 주저앉아 땅바닥에 뭔가를 하고 있다.(대원사는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언뜻 간음한 여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쪼그려 앉아 무얼 하는 것일까...호기심에 다가가다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거리가 꽤 있어서 줌으로 주욱 당기는데...어...카메라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
이런..낭패가....땀을 삐직거리며 아무리 해봐도 툭 튀어나온 렌즈는 들어가지도 않고
끝내는 전원도 꺼지지도 않는다.
참 나 원...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배낭에 그대로 조심스럽게 집어 넣었다.
기운도 쭉 빠지고....원래는 대원사 위 유평마을까지 가려 했으나
영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대원사 경내도 못찍고, 대원사 앞 그 유명한 250년 된 백매 사진도 못찍고...
물론 내려 오면서 아름다운 계곡 사진도 마음으로만 찍었다.
마음은 안타까웠지만 내려오는 길이 너무 좋아서 발걸음은 가볍다.
대원사 주차장에 내려와 빈의자에 배낭을 풀고 앉았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주인 아줌마는 읽던 책을 엎는다.
얼핏 보아 불경을 해석한 책인듯 싶다.
서울을 가련다고 물으니 한 40분 후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원지에서 바로 연결이 된다고 한다.
조옷타! 이제 끝이다.
바로 잘 연결이 되도록 부탁하고 막걸리 하나와 파전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계산을 하려고 카드를 꺼내니
아이구...'손님 카드는 안되는데요....'
이런 일이...이걸 우짜나...지갑을 보니 만 원짜리 딸랑 한 장...
내가 가진 돈이 별로 없고 카드 밖에 없다고 말하자
그 예쁜 아주머니 '그라무요 서울 가셔가꼬 부치주이소' 한다...
미안해서 어쩌나...내 신분증을 보여 드릴께...하니까
'마 개안씸더...펜히 가시가 부치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약간 미안하기도 하고 너무 고맙기도 하고
어쨌든 막걸리도 마시고 파전도 푸짐히 먹고...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다.
사진을 못찍은 아까움은 저 멀리 사라지고 기분좋은 웃음에 입만 벌어질 뿐이다.
대원사 석탑이 영험이 있다더니 나에게 이런 자비를 베푸는가도 싶다.
여러 번 고맙다고 인사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누구든 대원사 주차장(버스 정류장)에 가면 예쁜 주인 아줌마에게
5월5일 그냥 먹고 내뺀 친구가 안부전하더라고 이야기 해주소...
물론 꼭 현금을 준비하고 아무거라도 사서 드시오...
원지에 내리자마자 바로 진주에서 올라오는 고속버스가 있어 갈아 타고
무사히...아주 편하게 남부터미널로 올라 왔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남들 2박3일 이상의 즐거운 나홀로여행이었다.
대원사 정류장 예쁜 아주머니~~~복받을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