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밤 12시에 남부터미널에서 진주행 버스를 타고
원지에서 내리니 3시 15분 정도...
사방은 깜깜하고 비는 부슬부슬...
택시 차부에는 주무시는 기사 한 분..
창문을 두드리니 바로 깨신다.
중산리 얼마에요? 삼만오천원입니다...바로 중산리로 출발..
할증 미터기로는 4만원이 넘는데 약속한대로 삼만오천원...
택시 가격은 공정가인가 보다.
중산리에 내려서 일단 준비한 김밥으로 배를 채우니 몸은 으슬으슬하다.
평일에다 비가 부슬거리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무조건 오르막이다.
헤드랜턴이 비추는 발밑이 하얗다.
바로 쪽동백꽃...비바람에 떨어져 반짝인다.
학교 뒷산 쪽동백은 이미 다 졌는데 여기는 한창이다.
땅에 떨어진 별...하얀 쪽동백...향기도 올라온다..
계속 오르기만 한다.
말이 필요없다.
사방은 적막하고 안개비는 얼굴을 간지럽히고...
그저 묵언수행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발걸음을 옮긴다.
슬슬 숨도 차오르고 그러나 날은 아직 어둡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무조건 오르기만 할 뿐...ㅎㅎ
참 미련한 짓이다.
아무리 갈증이 나도 그렇지 왜 가끔 이짓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내 근력과 의지를 시험하려는 것도 아니고...
6월이라 해가 일찍 뜬다.
5시를 좀 넘었을까...벌써 주위가 환해진다.
비도 그친 것 같고...
담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펴진다.
오르자...
비가 또 후두둑하며 떨어진다...
제발 정상에 있을 땐 그쳐주기를...
정상은 안개비로 덮였다.
바람이야 뭐 지리산 바람답게 계속 불어오고...
여기선 안개비지만 저 아래에서 보기엔 그냥 시커먼 구름이겠지.
사물은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제멋대로, 보여지는대로가 전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져야 하는데...
정상에 올랐으니 일단 사진 한 장...
제석봉 아래 너른 평원엔 주목들이 곳곳에서 다른 모양을 하고 서 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위로 죽 벋어 짧은 가지를 펴고 있는 놈들이 가장 많고
쓰러져 누워 편히 쉬고 있는 놈 등 다양하다.
그 중 눈에 띄는 놈 하나.
거북이 같기도 하고 현무도에서본 현무 같기도 하고...
휴대폰으로 찍고...
배낭에 작은 카메라가 있지만 꺼낼 엄두가 안난다.
비바람이 계속 몰아쳐 마음만 바쁘다.
어서 장터목으로 가야지...ㅎㅎ
장터목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몇 있다.
열 번 넘게 왔지만 오늘처럼 한산한 것은 처음이다.
마누라님이 정성으로 싸준 김밥과 우엉주먹밥을 우겨 넣는다.
춥다..흐흐흐...뜨끈한 국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찬밥에 찬물을 먹고 나오니...으악...
몰아치는 비바람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몸에 열이라도 내려고 백무동으로 내리막길을 달린다.
우비를 준비하지 않아 이미 온몸은 젖었고...
그래도 내려가기만 하니 마음은 느슨하게 편하다.
내려갈 때 조심해야지.
산을 오를 때는 기술이고 내려갈 때는 힘이다.
더구나 비에 젖은 바위 너덜길은 미끄럽다.
발과 다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힘을 주어 내려간다.
비바람이 몰아치니 카메라를 꺼내지도 못하고 휴대폰 밧데리는 다 떨어지고...
그래도 마음은 편안한데 다리에는 힘이 팍팍 들어 간다.
드디어 비도 그치고 바람 불 때만 후두둑 남은 빗물이 떨어진다.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한 두장 찍는다.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역시 초록은 예쁘다..
서울에서는 볼 수도 없는 빛깔...
이제 초록에 묻힌다.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들지 않더라도 정말 아름답다.
그만 초록물을 온몸에 들이고 여기에 눕고 싶다..ㅎㅎ
눈에 띈 고목 하나...사슴인지, 기린인지..
언제 썩어 쓰러질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용모양으로도 보이며 제대로 서 있다.
바위에서도 뿌리를 박고 작은 생명은 살아 난다.
비도 한바탕 뿌렸으니 더 힘차고 끈질기게 살아 남을 것이다.
여러가지 삶의 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간들보다 얼마나 강한가.
하찮게 여겨지던 풀뿌리 하나, 작은 나무 하나가 어설프고 연약한 인간보다 낫다.
생명은 고귀하다는 진부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참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거의 다 내릴 무렵 갑자기 온땅이 환해진다.
어두움에서 보이지 않던 쪽동백들의 모습.
비바람에 떨어져 화려하게 수를 놓고 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척척하다.
방수가 안되는 신발이라 발마저 퉁퉁 불어 있음이 느껴진다.
ㅎㅎ 그래도 기분은 좋다. 다 내려 왔으니...
터미널 바로 옆에 음식점은 닫혔다.
다시 발길을 돌려 제일 가까이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메뉴판을 보고 헐한 김치찌개를 시킨다.
8천원에 반찬도 깔끔하고 찌개맛도 괜찮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 가니 몸도 마음도 좍 풀린다.ㅎㅎ
슬슬 출발할까...
매번 백무동에서는 동서울터미널로 가게 되는데
오늘(6월 5일)부터 2시 반에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개통된단다.
캬~~~이런 행운이...
주말에는 남부터미널에서 중산리까지 가는 심야버스가 있으니
택시비를 들이지 않아도 좋다.
백무동에서 남부로 오는 버스 노선이 생겼으니 정말 편하게 되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듯한 행운때문에
온몸은 젖었지만 마음만은 뽀송뽀송하다...
이제 버스를 타면 6시 반이면 터미널에 도착하고,
한 시간 후면 집에 가서 샤워하고...ㅎㅎㅎ
버스 안에서 푹 자자...
제법 근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 코스를 적극 추천한다.
물론 지리산을 길게 종주한다면 여유도 있고
콧노래 부르면서 멋도 즐길 수 있겠지만
나처럼 시간은 넉넉하지 않고 지리산에 심한 갈증을 느낀다면
이 길 또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주말 토요일 하루만 투자하면 천왕봉을 끌어 안을 수 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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