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에서 수학하며 성악가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테너 임정현(51)씨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영결식을 계기로 결성된 아마추어 노동자 합창단 ‘이소선합창단’의 단장이다. 지난달 24일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이소선합창단의 정기공연 전 최종 리허설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임 단장.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에서 수학하며 성악가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테너 임정현(51)씨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영결식을 계기로 결성된 아마추어 노동자 합창단 ‘이소선합창단’의 단장이다. 지난달 24일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이소선합창단의 정기공연 전 최종 리허설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임 단장.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임정현 이소선합창단 단장

지난달 24일 서울시청 8층의 다목적홀. 500여석의 객석이 꽉 차고 통로 계단참에도 관객이 빽빽이 자리했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자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합창단원이 양쪽으로 입장했다. 그들의 첫 노래는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이었다.

“생각해 봐요. 모든 이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 꿈을 꾼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 혼자만이 아니죠 / 언젠간 당신도 함께해요. 그럼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전태일 열사의 45주기를 맞아서 ‘이소선합창단’이 마련한 정기공연 무대였다. 아들 전태일의 뜻을 이어 평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던 이소선 여사가 2011년 세상을 떠났을 때 “노동자 하나 되라”던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함께 구성했던 영결식 추모합창단이, 2014년 공식 창단된 이소선합창단의 모태가 되었다.

이날 공연의 주인공은 42명의 합창단원만이 아니었다. 공연 중반, 합창단을 대표해서 마이크를 잡은 단원 하나가 객석에 있던 노동자들을 호명했다.

“136일째 고공농성 중인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 합법적 노조를 인정하지 않아 농성 중인 세종호텔 노동자들, 7년간 28명이 세상을 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 1000억원의 흑자를 내고도 공장 폐쇄하고 먹튀한 하이디스의 해고 노동자들….”

두툼한 파카에 투쟁구호가 적힌 조끼를 걸친 이들이 하나둘 무대 위로 모였다. 공연 제목처럼 ‘세상의 모든 전태일에게’ 바치는 무대였다. 길바닥에서 자기 몸을 전단지 삼아 구호를 외치던 이들, 쇠사슬에 몸을 묶고 고공농성을 벌이던 이들, 사지를 들려 쫓겨나고 볼품없이 내팽개쳐지던 이들이,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함께 노래했다. 울분과 상처, 투쟁의 격렬함은 잠시 내려놓고 자기 안의 곱고 귀한 것들을 맘껏 펼쳐내는 자리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가장 뜨거운 울림이었다.

앙코르는 네 번이나 이어졌다. 땀에 젖은 지휘자가 객석을 향해 깊이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꽁지머리에 듬직한 체구, 테너 임정현(51)이었다. 그는 이소선합창단의 단장을 맡고 있다. 클래식을 하는 성악가가 아마추어 노동자 합창단을 이끌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공연 며칠 뒤, 인터뷰를 위해 그를 다시 만났다.

엘리트 코스 밟아온 성악가
이탈리아·독일·폴란드서 수학
국제콩쿠르에서도 입상한 테너가수
오페라무대에 섰던 그는 지금
노동자 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김광석 안치환과 ‘새벽’서 활동
‘노찾사’ 1집에 참여했으며
부산서 ‘노래야 나오너라’ 결성
대우조선 등 노조 노래패도 지도
그의 주업은 노동자 노래운동

임정현을 만든 시간들
임정현을 만든 시간들
한달에 1만5000원, 김밥 값도 안 되지만…

-공연이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 작년에 창단공연 할 때까지만 해도 ‘아, 이런 합창단이 생겼구나!’ 긴가민가하면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2011년에 처음 같이 합창을 해본 이후에 여기저기 노동 현장이나 집회를 다니면서 노래를 했지만 정식 창단은 작년에 했거든요.”

-작년엔 얼마나 모였죠?

“한 300~400명?”

-올해는 거의 그 두 배가 모인 거군요. 노조에서 단체로 오신 건가요? 유료 관객은 얼마나 되죠?

“거의 전석이 유료예요. 초대권 드린 경우는 그날 ‘떼창’에 참여한 노동자들 정도? 투쟁 현장을 대표해서 오신 분들이요.”

-관객들 모두 이소선 합창단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오신 것 같군요. 처음 합창단 만들어질 때부터 관여하셨나요?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연락을 받았어요. 영결식에서 양대 노총이 같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진행할까 고민고민하다가 저한테 전화를 준 거래요. 그길로 바로 달려갔죠. 영결식 전날 저녁 7시에 모여서 부랴부랴 편곡하고 가르치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한텐 녹음해서 보내주고….”

-하룻밤 만에 준비를 한 거네요.

“네. 그렇게 연습해서 서른 명 정도가 다음날 영결식장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아, 노동자들이 언제 연습해서 저런 멋진 공연을 할까?’ 놀라고 감동했다고 해요.”

-정식 합창단처럼 파트도 나누고 그렇게 부른 건가요?

“그렇게 했죠. 들어보고 좋으니까 장례위원회에서는 이걸 노제에서도 하자고 했는데, 그걸 할 수가 없었어요. 다들 교대근무라서 끝나자마자 가야 됐거든요. 그때 노제를 못 따라간 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어요.”

그 아쉬움 때문에, 다시 모여서 노래를 계속하자고 뜻이 모아졌다. 그러나 근무지역도, 근무시간대도 제각기 달라 일정을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2주에 한번씩 모이기로 했는데, 많이 모여야 열 몇 명, 어떤 때는 네 명이 모이니 창단을 할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다가 다시 오디션을 통해 대거 새로운 단원을 모집해서 정식 창단한 것이 작년이다.

-단원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다양해요. 교사도 있고 간호사, 지하철 노동자, 시민단체 활동가….”

-오디션 때는 주로 뭘 보세요?

“음치는 안 되니까 뭐든 자신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 한 곡은 있어야죠. 그 소리를 듣고 파트를 구분해 주고,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할 사람들인가 봐요. 그래서 오디션에서 떨어진 사람은 이때껏 없어요.(웃음)”

합창단은 매주 수요일 퇴근 후에 모인다. 공연을 앞두고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 연습을 하기도 했다. 다들 직장에 매여 있는 처지에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고는 합창단으로 활동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지휘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지휘자, 반주자들 같은 분은 합창단에서 월급을 받으시나요?

“어휴! (손사래를 치며) 뭐 그런 걸! 아무것도 없어요. 올해부터 차비 정도 주기 시작했는데 어차피 한 달에 1만5000원씩 내서 하는 일이라….”

-1인당 1만5000원이요?

“예, 한 달 1만5000원씩 단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이 되는데, 저녁에 먹는 김밥 값이 회비를 추월할 때도 있어요.(웃음) 작년에는 만원이었는데, 해고 노동자는 그것도 내기 어렵고. 할 수 없어서 올해부터 5000원 올린 거예요.”

-합창 지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면 개인레슨 같은 것도 못할 테니 손실이 클 텐데요.

“합창이 주는 힘과 묘한 매력이 있어요.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닌 여러 사람의 소리가 합쳐지고 포개지는 것. 지향하는 바가 같은 이들이 내는 소리가 사람들한테 큰 감동을 주잖아요. 오래전부터 제 꿈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노동자합창단이 있었으면 하는 거였는데, 살다보니 꿈꾸던 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전 마음이 아주 편해요.(웃음)”

이소선합창단은 전태일 열사 45주기를 맞아 지난달 정기공연을 열었다. 교사, 간호사, 지하철 노동자, 시민단체 활동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매주 수요일 퇴근 뒤에 모여 연습하며 한 달에 1만5000원씩 걷는 회비로 합창단 운영비를 충당한다. 아래 사진은 공연 나흘 뒤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임정현 단장.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소선합창단은 전태일 열사 45주기를 맞아 지난달 정기공연을 열었다. 교사, 간호사, 지하철 노동자, 시민단체 활동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매주 수요일 퇴근 뒤에 모여 연습하며 한 달에 1만5000원씩 걷는 회비로 합창단 운영비를 충당한다. 아래 사진은 공연 나흘 뒤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임정현 단장.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클래식이든 뽕짝이든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야

임정현은 성악가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서울예고와 서울음대를 거쳐 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에서 8년간 수학하고, 2002년 브린디시 국제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한, 관록 있는 테너가수다. 2004년 귀국 후 다수의 초청 독창회와 오페라 무대에서 공연을 펼쳤고, 클래식과 대중가요, 노동가요와 영상, 그림을 한데 아우르는 독창적인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작곡가 윤이상씨나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씨처럼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분 가운데 시대적 메시지를 중시하시는 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성악 전공자 중에는 그런 분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요. 선배 성악가 중에 그런 롤모델이 있나요?

“글쎄요… (한참 생각하다가 갸웃거리며) 사회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예술가 후배들은 꽤 많아요. 나처럼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누군가 날 이끌어 주는 선배나 롤모델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저한테 크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렇게 살기로 작정한 이상, 답이 헷갈린 적은 별로 없어요.”

-클래식을 전공했는데 왜 노동가요를 하세요?

“문화에는 고급과 저급이 따로 있지 않아요. 오래도록 전해지는 고전이라는 건 물론 있지요.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그림이나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는 음식처럼, 세월이 흘러도 살아남는 명작들. 근데 그게 꼭 돈 많은 사람들만 향유하는 건 아니거든요. 자기의 애환과 슬픔을 담아낼 수 있다면 클래식도 좋고 뽕짝도 좋은데, 왜 노동자들은 그걸 다양하게 즐길 수 없느냐는 거죠. 유학 가서도 늘 생각했던 게, 내 마음의 노래, 시대를 담으면서 감동을 주는 노래를 하고 싶단 거였어요. 성악가들이 노동자와 소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노동자들도 오페라, 뮤지컬 같은 걸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래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나 봐요. 부산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어린이합창단도 하셨다고요?

“아이, 그거… (쑥스러운 듯)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에요. 아주 어렸을 때.”

-그래서 성악과를 가겠다 일찌감치 맘먹었나요?

“아녜요. 어려선 체격이 또래보다 큰 편이라 유도해 봐라, 야구해 봐라 꼬시는 사람들이 많았죠. 지금 이 키가 중3 때 키거든요.(웃음)”

-그럼 음악을 전공하기로 한 건 언제…?

“중3 때 졸업 3개월 남겨두고 예고 갈 결심을 했죠. 남자로 태어나서 집에서 좀 떨어져서 살아보고 싶단 생각에,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예고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죠.”

-집안에서 반대 안 하시던가요?

“아버지가 ‘어, 그래?’ 하고는 그길로 원서를 사 오셨어요. 내가 음악공부 열심히 해서 ‘음악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거든요. 아버지로선 150% 찬성이었죠.”

아버지는 목사였다. 3남1녀 중 막내인 정현을 유독 사랑하셨고, 그 아들이 음악을 하겠다고 할 때 두말없이 손을 들어준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나 어린 정현이 음악목사의 꿈을 접은 것도 결과적으로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 임기윤 목사는 정현이 서울예고 1학년일 때 돌연 세상을 뜨셨다. 보안사에 끌려간 지 일주일 만이었다.

임정현
임정현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 “정현아 몸조심하거라”

임기윤 목사는 1922년 평남 용강 태생이다. 해방 전, 조만식 선생을 모시고 청년활동을 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체포령이 떨어져 월남했다. 1951년 중앙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목사 안수를 받아 부산제일교회를 담임하며 평생을 검소하고 양심적인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김구 암살과 박정희 독재를 목도하면서 아버지는 “김일성 탄압 때문에 내려왔는데 여기에 그 못지않은 놈들이 있구나!” 탄식하곤 했다.

-임기윤 목사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분이시죠.

“어렸을 때 교회 앞에 항상 경찰 백차가 와 있던 기억이 나요. 정치적으로 쫓기는 분들이 우리 집을 많이 거쳐 갔죠. 김대중씨도 그랬고, 동일방직 노동자들도 그랬고. 우리 집은 항상 ‘진주교도소 가는 길목에 있다’고 그랬어요.(웃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젠가요?

“1980년에 서울로 유학 와서 고1 때였는데, 7월3일이 제 생일이라 아버지가 올라오셨어요. 아버지가 뭘 예감하셨는지, 평소 안 하던 말씀을 하셔서 좀 이상했죠.”

-뭐라고 하셨는데요?

“평생 그런 얘기 하는 분이 아닌데 ‘얘야, 수원에서 나를 초청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리 옮길까?’ 하시더라고요. 아버지가 나를 걱정해서 그러시나 했어요. 내가 형이나 누나들 영향도 있고 어려서부터 집에 쌓인 게 신학 책이라 본회퍼(해방신학자) 책도 보고 해서… 내가 고1 때(80년 ‘서울의 봄’) 기숙사가 있던 서울 서대문 바닥이 완전 난리였는데, 기숙사 선배들이랑 나가서 데모도 하고 그런 걸 아시는 눈치셨어요. 헤어질 때 ‘정현아, 몸조심하거라!’ 하셨고 저도 ‘아버지, 몸조심하세요!’ 그랬는데,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되었죠.”

그로부터 2주일 후, 아버지는 ‘삼일공사’(보안사 부산분실)에 끌려갔다. 광주 5·18 학살의 진상을 알리고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이틀 뒤, 아버지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기별이 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의식을 잃은 후였고 닷새 뒤 숨을 거두셨다. 보안사 쪽과 담당 의사는 ‘고혈압에 의한 뇌졸중’이라고 주장했지만, 간호사 출신 어머니가 보기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해명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혈압도 정상이고 건강했다. 아버지의 왼쪽 뒤통수에 피가 엉겨 붙은 상처를 발견한 어머니는 ‘그냥 쓰러져서 이런 상처가 생길 수 없다’며 항의했지만 관련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5·18 민주유공자묘역으로 이장할 때 유골을 수습한 사람들은 ‘맞아서 깨진 상처’라고 입을 모았지만, 여전히 그의 사인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고1 때 그런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컸겠어요.

“충격이었죠… (잠시 침묵) 그 충격을 가슴에 묻어놓고 누구한테도 말을 못했어요. 처음 외지에 가서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선생님들도 낯선데… 어디 가서 무슨 얘길 하겠어요?”

-누구한테든 털어놓고 감정을 터뜨려야 상처가 덜 남는 법인데… 교회도 위로가 안 되던가요?

“너무 질려버렸어요. 신앙이 있다 없다, 내 종교 남의 종교로 나누고 대별하면서,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교회, 세상에 대해서 입도 뻥긋 못하는 교회… 어린 마음에 큰 배신감을 느꼈죠.”

-그럴 때 뭘로 푸셨어요? 노래로?

“아니요, 술로요…(웃음)”

-사춘기에 엄청난 고통이었을 텐데, 그 와중에도 예고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하셨어요. 학생운동이 한창 치열할 땐데,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스스로 방어적이 되지 않던가요?

“내가 머리가 나쁜 건지, 사람이 모자란 건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쁜 거를 나쁘다고 하는 게 뭐가 문제야? 그렇게 생각했죠. 음대 들어가서 연극반도 만들고 ‘예술과 사회 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도 했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나도 아버지처럼 끌려가면 어쩌지?’ 하고….

“아이, 두렵죠. 제가 얼마나 겁이 많은데요.(웃음) 두렵긴 한데, 그건 끌려갈 때 생각하면 되잖아요…. 사실 제가 제일 고민했던 문젠 따로 있었어요. 행여 누가 ‘너 아버지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그럴까봐서. 그런 소리 듣기 정말 싫었거든요. ‘아버지는 잘 사신 분이다. 나도 아버지를 벗어나서 인간 임정현으로 잘 살고 싶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색깔로 살아야지. 아버지 나이 때까지라도 열심히 해봐야지’ 다짐했어요.”

목사인 아버지를 기쁘게 할
‘음악목사’ 꿈꾸며 서울예고 입학
80년 그해 보안사 끌려간 아버지
주검으로 돌아와 충격 안겨
입도 뻥끗 안하는 교회에 실망

교회를 등졌다고 했지만
그의 노래는 성가처럼 들렸다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걷지만
결국 같은 구도자의 길 걷는다
덜 부끄러운 선대가 되기 위해

“아무것도 안하는 게 제일 불편해요”

대학 졸업 즈음해서 주변 친구들의 진로는 대개 두 가지였다. 유학길에 올라 성악가의 길을 가든가, 감옥에 가든가. 임정현은 그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김광석, 안치환 등과 함께 대학 노래패들이 모여 만든 ‘새벽’에서 활동하며 <노찾사> 1집 제작에 참여했고, 부산에 ‘노래야 나오너라’라는 노래패를 만들었으며, 대우조선과 현대중공업, 서울지하철 노조의 노래패를 지도했다. 생계를 위해서 교회 지휘도 하고 서울 모테트합창단에서 잠시 일도 했지만, 그의 주업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를 위한 노래운동’이었다.

-전공인 성악에는 관심이 없었나요? 왜 자기 노래를 안 하고 노래패 지도만 했어요?

“음대 입학하고 나서, ‘내가 클래식을 왜 하지? 내가 하는 노래가 사람들한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회의가 들고 절망했어요. 세상의 기반이 되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내가 밥은 못 먹여도 문화로, 노래로 함께 하는 일은 할 수 있겠다. 그들의 노래가 내 노래보다 훨씬 설득력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후로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민중문화운동도 한풀 꺾였어요. 1996년에 유학을 떠난 건, 그런 패배감 때문인가요?

“아녜요. 패배감 때문에 떠난 사람들은 1990년대 초에 다 나갔어요. 난 미련해서 그런가 여전히 꿈이 있었어요. 근데 그때쯤 되니까 제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더라고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은, 항상 최고의 상태로 자신을 만들어서 좋은 내용물을 만들 수 있어야 하잖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최대화시켜서 다시 한 번 부딪쳐 보자, 그런 생각으로 유학을 간 거죠.”

유학 비용을 줄이기 위해 1995년 결혼한 새색시를 한국에 두고 1996년 33살의 나이로 유학을 떠났다. 8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2004년 그는 ‘테너 임정현’이 되어 돌아왔다.

-8년 만에 다시 본 한국은 어떻던가요?

“디제이(DJ),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으니 세상이 훨씬 많이 좋아져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한숨) 이게 뭐야!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했어요. 노동자들을 알아주지 않고 탄압은 계속되고, 그래서 대안 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한경쟁의 병폐는 더 커지고요.”

과거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서 임정현이 시작한 일은, 돈 있고 학식 있는 이들의 전유물로 통하는 클래식을 일하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일상의 문화로 만드는 일이었다.

2004년 오페라 대중화를 위한 사회적 기업 ‘포스오페라’를 설립해서 영상과 해설이 있는 오페라를 기획하고, 우리말로 된 <금강 칸타타>를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고, 클래식과 대중가요와 민중가요를 함께 아우르는 콘서트를 열었다. 음악은 땀 흘려 일하는 대다수를 위한 노래, 그들의 풍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서양 클래식은 여전히 지루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걸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게 창피한 일이라고 여겨서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요.

“오페라 아리아의 가사도 번역해서 보여주고, 오페라 무대 세트를 간략하게 해서 스크린에 영상을 쐈어요. 그러면 부피도 줄어들고 비용도 확 줄죠. 봉고차 하나 빌려서 뒤에다가 꽉 차게 실으면 전국 어디든, 시골 노인회관도 갈 수 있어요. 해설자가 피아노 치면서 해설하고 연극배우도 쓰면 다섯 살, 여섯 살짜리 꼬마들도 까르르 웃고 편안해해요. 최근엔 어느 아파트에서 자기들 몇 주년 행사라고 불러서, 오케스트라하고 성악가들 같이 가서 야외무대에서 공연했어요. 큰돈은 안 되지만 사람들과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에요.”

성악가로서의 기량을 갈고 다듬기 위해 독창회를 열거나 오페라에 출연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12년에는 음반 <아름다운 생애, 아름다운 미래>도 발매했다.

-오늘 저한테 주신 명함은 ‘포스오페라’가 아니라 ‘핌아트 협동조합’인데요.

“이번 9월에 포스오페라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했어요. 우리 공연활동도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바꾸고 싶어서요. 성악가, 지휘자, 기획자 합해서 모두 열한 명으로 시작했어요.”

-개인적으로 부대끼고 힘들 땐 클래식 들으세요, 노동가요 들으세요?

“아무것도 안 들어요.(웃음) 전문가잖아요. 음악을 들으면 너무 몰입하고 따지게 돼요. 편안히 듣기 어려워요.”

-노래방 가면 무슨 노래 부르세요?

“조용필의 ‘큐’나 ‘슬픈 베아트리체’, 김민기 ‘금관의 예수’가 십팔번이에요.”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예요?

“가만히 있을 때, 아무것도 안 할 때가 제일 불편해요. 노동현장 가서 노래 부르고 뒤풀이하면서 얘기하고 그럴 때가 훨씬 즐거워요. 술도 덜 먹고.(웃음)”

임정현이 녹음한 음반에는 브레히트의 시에 곡을 붙인 ‘후대에게’라는 노래가 있다.

“폭력 없이 살아가고 악을 선으로 갚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 내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정말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마침내 인간이 인간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거든,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를 기억해 다오.”(송현주 곡, ‘후대에게’ 중에서)

그는 교회를 등졌다고 했지만, 그의 노래는 왠지 성가처럼 들렸다. 아버지 임기윤 목사와는 다른 길, 그러나 같은 구도자의 길을 그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후대에게 덜 부끄러운 선대가 되기 위해 그는 지금도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녹취 이돈섭

이진순
이진순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