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404

나무

연한 잎이 나오면 꽃은 때를 알고 사라진다. 잎은 꽃의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꽃도 잎의 찬란한 생명력을 탐내지 않는다. 그저 자기의 때를 알고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다. 뿌리는 뿌리대로 드러나지 않음을 불평하지 않고 울퉁불퉁 단단한 껍질도 못생김을 탓하지 않는다. 뿌리는 꽃이 되려 하지 않고 꽃은 뿌리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껍질도 잎을 시기하지 않고 잎도 껍질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한 그루 나무로만 살아간다.

미메시스 2022.04.28

생 일

생 일 다 똑같이 해뜨고 달지는 날인데 어느 날은 새해 첫날이 되고, 어느 날은 마지막 날이 되고, 어떤 날은 울음으로 태어난 날이 되고, 어떤 날은 웃음으로 하늘로 돌아가는 날이 된다. 한 숟갈 한 숟갈 떠먹다 보니 그릇에 남은 밥은 갈수록 줄고 어깨는 등짐을 하나 보탠 것처럼 무거워 더 수그러진다. 아흔여섯 어머니와 일흔이 코앞인 나를 다시금 이어주는 날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의 끈 앞에서 누구나 그렇듯 아무것도 이룬 것 없어 마음만 헛헛하다.

미메시스 2022.02.10

어무이와 TV

어무이와 TV ​ 어무이 방엔 오래 된 옛날 TV가 있다. 요즘 TV처럼 얇고 날렵하지 않고 등이 볼록하게 나와 무겁고 굼뜬 모양을 하고 있다. 허리가 구부러진 우리 오마니와 데칼코마니다. ​ 어무이는 하루 종일 한 방송만 켜 둔다. 아주 오랜 옛날 우리집에 TV가 처음 놓여지던 날부터 지금까지 일편단심 TV는 늘 한 목소리다. 벽에 기대 잠깐 졸 때도 누워서 낮잠을 주무실 때도 TV는 혼자 중얼거리며 잔소리를 해댄다. ​ TV에 빙의되신 아흔여섯 어무이는 오늘도 ‘밥은 묵었나’ ‘일찍 들오그래이’ ‘애비가 늦게 들오믄 내가 잠을 몬잔대이’ 일흔을 바라보는 내게 입에 붙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 TV와 어무이는 반 접어 펼친 데칼코마니다. 풍경뿐 아니라 잔소리와 행동도 빼다 박은 판박이다.

미메시스 2021.03.13